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일본의 '나라'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일본의 '나라'
  • 오문수 시민기자
  • 승인 2008.02.1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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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수의 일본여행기 5] 불교문화유산이 널려 있는 도시
▲ 일본에서 가장 큰 대불이 있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 도다이지

'나라'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시작된 땅이다. 본디 '나라'는 일본 고대사와 신화, 그리고 전통의 무대이며 교토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토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본 예술과 문화의 요람이기도 하다.

서기 710년부터 784년까지 일본의 수도였으며, 불교가 왕실의 보호 아래 처음으로 융성한 곳도 나라이다. 중국과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불교는 귀족들의 열성적인 귀의와 보호를 받아 귀족불교라 일컬어졌는데, 귀족들은 권세를 자랑하기 위하여 조정을 본떠 절과 탑을 짓는데 열성적이었다.

▲ 높이 50m로 현존하는 오중탑 가운데서 교토의 도지 다음으로 높은 고후쿠지 오중탑
약 1200년 전 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큰 도시였으며 커다란 궁궐과 사찰이 있었다. 나라의 사찰에는 국보급 불상과 고대부터 전해오는 귀중한 예술품들이 다수 안치되어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느낌을 준다.

숙소인 오사카 가미역에서 JR전철을 타고 주변경치를 구경하며 40분쯤 달리니 나라역에 도착했다. 역에 있는 여행자 안내센터에 들르니 친절하게 가르쳐주며 지도를 준다. 그리고 시간까지 계산해서 오늘 방문할 수 있는 관광지와 방법까지도.

일본말을 모르는 개인 여행자는 가급적 역에 있는 여행자 안내소에 가면 영어로 안내받거나 때론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안내원을 만날 수 있다. 길을 건너며 점잖게 생긴 신사한테 물으니 산조도오리를 알려준다.

▲ 먹을 것을 달라고 졸졸 따라다니는 사슴과 관광객
산조도오리는 JR나라역에서 사루사와이케까지 이어지는 나라시의 중심가로 이 거리만 따라가면 유명한 고후쿠지와 나라코엔(나라공원),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까지 갈 수 있다. 아스팔트 대신 벽돌이 깔린 도로 양쪽에는 다양한 상점과 옛날 집과 신사들이 보인다.

남도칠대사(南道七大寺) 가운데 하나인 고후쿠지는 669년 당시의 호족 세력이었던 후지와라 카마타리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의 부인이었던 가가미노 오오키미가 남편의 쾌유를 기원하며 세운 절이다. 5차례의 화재로 6번째 재건됐으며 높이 50m로 교토의 도지 오중탑 다음으로 높다.

고후쿠지 경내에서 도다이지 방면으로 넓게 펼쳐진 나라 공원 한쪽에 자리 잡은 서양식 건물이 나라 국립박물관이다. 1895년 개관한 박물관은 불교미술품의 정수를 보여주는 소장품이 많아 많은 관람객이 오며 현재 국보급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 전통 목조건축에서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인 도다이지 대웅전의 '공포' 모습으로 우리와 흡사하다
나라공원은 1880년 2월 14일에 만들어졌다. 사슴은 예로부터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의 ‘사슴신’으로 보호되어 왔는데 사슴에게 해를 끼치는 자는 엄벌에 처해진다. 사슴들은 사람의 손을 타 두려워하지 않고 먹을 것을 달라고 졸졸 따라다닌다. 어떤 청년은 여자 친구의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고 청년의 엉덩이를 머리로 받아 청년이 기겁하는 걸 봤다.

도다이지는 나라의 동쪽에 위치한 대사찰이었기 때문에 도다이지(東大寺)라 불렸다. 도다이지는 일본에서 가장 큰 대불이며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전신은 금종사, 후에는 금광명사라 불리던 사찰이었는데 쇼무왕의 뜻에 따라 대가람 건설이 시작됐다.

▲ 금강역사와 인왕상인 '아우' - 한국 절의 사천왕상과 다르다
하지만 몇 차례의 전쟁으로 소실됐다가 1709년에 완성됐다. 도다이지의 대불은 높이가 약 16m에 달하고, 목재, 금속과 관련된 기술자와 노동자는 260만명에 달하여 당시 일본 인구의 절반이 이 공사에 참여한 셈이다.

도다이지의 건축은 옛 백제의 기술자들이 건축했다는 설이 있다. 특히 처마의 추녀를 받치는 대웅전의 공포(전통 목조건축에서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는 우리의 건축양식과 흡사하다.

다만, 대웅전 입구 출입문의 추녀가 일본의 건축 양식이다. 우리의 절에는 대웅전까지 들어가는데 일주문에 이어 불법을 수호하는 무서운 얼굴의 4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을 거쳐야 한다.

▲ 대불 콧구멍 크기의 구멍으로 대웅전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구멍을 통과하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구멍을 통과하려고 안간힘이다
하지만 도다이지에는 일종의 천왕문인 남대문이 있다. 남대문에는 사천왕이 있지 않고 ‘아우’라고 불리는 인왕상이 있어 하나는 입을 벌리고 서 있고, 그 뒤에는 금강역사가 있다. 다른쪽 문의 ‘아우’는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다문 인왕상 뒤로는 탑을 손으로 받쳐 든 다문천이 있다. 결국 남대문에는 다문천과 금강역사 아우가 있는 점이 한국의 천왕문과 다르다.

나라대불 뒤편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커다란 기둥에 사람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나 있다. 이 구멍의 크기는 대불의 콧구멍 크기와 같은데 이 구멍을 통과하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어 몸집이 작은 사람들이 끙끙대며 통과한다.

▲ 소원을 비는 석등으로 가스가타이샤로 올라가는 길목에 2천여개나 있다.
도다이지와 5중탑을 보며 일본사람들은 목조로 짓는데 어떻게 이렇게 높이 지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대불 높이가 16m이니 절의 높이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커다란 목재는 어디서 구했을까 생각했는데 해답은 간단했다. 사람이 통과한 기둥의 밑둥을 보면 여러 개의 통나무를 둥글고 강력한 철근으로 함께 묶어서 둘레가 1m쯤 되고 높이가 2~30m쯤 되는 튼튼한 기둥이 된 것이다.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는 768년 당시의 호족인 후지와라나가테가 가문의 사원으로 창건하여 4명의 제신을 모시고 있다. 제신을 하얀 사슴에 태워 맞이했다고 하는 전설 때문에 나라에서는 사슴을 소중히 여긴다.

▲ '에마' - 소원성취를 비는 나무판으로 살아있는 말 대용으로 사용돼 말그림이 대부분이다. 합격, 취직, 건강, 가정의 평안, 승진 등이 대부분이지만 술이 여럿 달린 '에마'에는 '세계평화'란 글귀가 씌어있다.
이 사원은 사원에 이르는 길에 수많은 석등이 있는데 약 2천개나 된다고 한다. 지금껏 돌아본 절과 신사에는 언제나 ‘에마’가 있다. 에마는 소원성취의 사례로서 봉납하는 그림이 들어가 있는 나무판으로 살아 있는 말의 대용으로 주로 말그림이 많다.

에마의 내용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합격, 건강기원, 가족의 무사와 안녕, 부부행복, 취직, 승진 등이 전부였다. 딱 하나 예외를 발견한 것은 가스가타이샤의 ‘에마’ 중에 ‘세계평화’라는 글귀가 하나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 절의 수가 1만 3천개쯤 된다고 하는데 일본은 7만 5천개쯤 된다고 한다.

▲ 일본에는 수많은 자연재해와 전쟁, 자살로 죽음이 가까이 있다. 죽음을 관장하는 지장보살상 - 고후쿠지
불교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가 되고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면서 비롯된다. 불교에서는 무엇보다 평화와 평등이 중심사상이다. 우리나라의 5배가 더 되는 절과 8천만명 정도 되는 불교도들이 있는 나라에서 왜 그렇게 전쟁도 많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은 많을까?

재일교포이자 아시아태평양 인권정보센터 연구원인 박군애씨의 말에 의하면 일본은 현재 경제파탄, 소외감, 가족붕괴 등으로 4~50대 남자들의 자살이 늘어나 사회문제가 됐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며 더군다나 자살은 말할 것도 없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선비 문화가 바탕을 이루는 데 반해 사무라이라는 무사 문화가 근간을 이뤄 주군에 대한 충성과 천황을 절대시하는 데서 비롯됐다고 본다.

도다이지 대웅전 입구 오른쪽에는 목재로 된 핀돌라라는 부처 제자상이 있다. 핀돌라는 부처의 16제자 중의 하나로 신통력이 뛰어났고 일본에서는 그의 형상이나 신체의 일부를 문지르면 소원을 비는 사람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한다.

▲ 부처의 16제자 중 하나인 핀돌라상으로 신체의 일부분을 문지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관광객들이 문질러 발가락 부분이 반질거린다.
핀돌라상의 발끝 부분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문질러 반짝거린다. 우연히 백인 관광객이 소원을 빌며 문지르는 것을 보며 “뭘 빌었느냐?”고 묻자 “세계평화와 복숭아 뼈가 아파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말했다.

정말 우연일까? 단 한번 물어본 백인은 ‘세계평화’를 비는데 돌아본 거의 모든 ‘에마’에는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자신만을 위한 기원문이었다. 부처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기복신앙에 빠져서 목숨을 그렇게 쉽게 여기는 건 아닐까? 일본으로부터 수많은 피해를 당한 한국인으로서 인류의 평화 공존을 위한 일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본다.


덧붙이는 글 / U포터와 오마이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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