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비교해 교통수단의 발달이 가져온 개념 중 가장 큰 변화는 거리감이 좁혀졌다는 사실일 게다. 짚신 싣고 발품을 팔아가며 일일이 걸어 다녀야했던 옛날의 십리길이란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을 터. 예전의 여수읍으로부터 꼭 십리길이라 하여 왕십리라 불렸던 마을이 바로 오늘의 둔덕동 용수(龍水)마을이다.
그러나 용수마을이 여수시민들에게 친근하게 와 닫는 직접적인 상징은 도심을 관통하는 연등 천의 발원지(發源地)라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옛 영광을 많이 상실하기는 했지만 이 마을의 용수천(川)은 그 풍부한 수량(水量)과 맑은 수질로 유명했는데 오죽 좋았으면 7년 가뭄에도 농사에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아 옥답(沃畓)이 많기로 정평이 나 있다고 4대를 살아온 마을 통장 김충헌씨(金忠憲·67)는 증언하고 있다.
신라시대 때 화랑들이 활동했다하여 화랑 산으로 불렸다가 마을을 옹위하는 형태가 호랑이형국을 닮았다 해서 호랑산(470m)으로 부르는 산이 여수에서 가장 높은 호랑산성과 함께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그 때문일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마을 근동 사람들도 너나없이 참전하게 되었는데 호랑산정기(精氣)로 말미암아 전사자가 단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도 신화처럼 마을사람들의 자랑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또한 용이 승천할 정도로 풍부했던 물을 자랑하는 용수천 옆의 마을에는 현재 우물이 하나 남아있는데 사철 불문하고 하얀 김이 무럭무럭 나는 풍부한 청량수를 주민들에게 공급했었다.그러나 급속한 도시변화의 바람에 따라 쇠락한 지금의 모습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그 영광을 재현하고자 3년 전 부임한 김의곤 둔덕동장은 단순한 식수공급차원을 넘어 이 우물이 상징하는 의미를 되새기기위해 복원할 계획도 가지고 있음을 내비쳤다.
“덕을 베푼다는 뜻을 가진 둔덕(屯德)동은 용수마을 외에도 ‘문치’와 ‘석교’마을 등 3개의 자연부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려(三麗)통합 후 여수의 중앙지역으로 부상한 둔덕동은 문치, 수문(修文)산 등 지명에서 보듯 문(文)을 숭상했고 모름지기 여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용트림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관내에 초·중·고등학교가 하나도 없어 학생들의 등·하교 길이 매우 불편할뿐더러 관내 유일한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도 그 정문이 미평동 쪽으로 나 있어 동과는 유리돼 있는 형편입니다. 또 금융기관마저 없는 관계로 인해 주민들의 불편은 날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다각도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동(洞)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인바 여수시와 관련기관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동참을 바랍니다.”
동민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고 있는 김 동장은 심각한 어조로 당면한 숙원사업을 털어놓기도 했다. 여수시 전체면적의 0.9%에 해당하는 면적의 둔덕동은 약 3천 가구에 인구1만 명을 육박한다.
관내 다양한 계층별 주민들에게 맞춤 프로그램을 통해 ‘만남의 시간’을 그 어느 동보다 자주 갖는 둔덕동은 ▲ 동사무소 옆 공한지를 매입하여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 수강생들의 주차공간을 확보하고 ▲ 도시변화에 따라 역설적이게도 식수난을 겪고 있는 용수마을·남해화학사택·군부대·라온 아파트 등 지역의 주민들 원만한 음용수공급을 위해 상수도 시설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케 하고 있다.
/기사제공 까치신문
떠는 비굴하기 이를데 없는 현실이다. 하물며, 시민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떨거지 시민협이 나 관변단체도 말할 나위없으니 여수시의 미래 참 암담하고 처참하기 이를데가 없으니 인구가 줄고 사람이 떠나는 이유를 이제사 알겠느뇨? 여수시 자칭 식자층들아...떼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