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경관, 최적의 테마관광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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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해안신문
  • 승인 2006.12.0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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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순례 >2< - 수려한 산세의 신덕동
유서 깊은 마을 <석현>(石峴)인지 <석연>(石硯)인지 규명해야

▲ 석현마을
우리나라 벼루의 역사는 약 2000년으로 본다. 처음에는 도자기로 만든 벼루인 도연(陶硯) 위주로 제작되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돌벼루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벼루역사를 이르고자 함은 아니다. 이조 초기 정권으로부터 축출당한 한 선비가 유배돼 정착한 곳이 현재의 신덕 동 석현마을인데 마을 이름부터 뭔가 미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석현>(石峴)인지 <석연>(石硯)인지부터 바로잡고 넘어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이 선비가 마을로 유배돼와 차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을의 학동(學童)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생계수단이 막막했던 터라 틈틈이 돌벼루를 만들어 원하는 주민들에게 건네주고 곡식과 부식물을 받아 연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돌벼루는 한자로 석연(石硯)이다. 이 마을에는 지금도 뛰어난 재질의 돌들로 유명하다. 소위 청석(靑石)으로 불리는 이 돌은 재질이 강하면서도 유연성이 함께 묻어나 벼루를 만드는 데 그만인데 아마 모르긴 해도 이로부터 마을 이름이 <석연>마을로 불리다가 지금의 <석현>마을로 변하지 않았나 싶다.

이는 따로 분명하게 규명해볼 일이다. 석현마을은 까마귀 형국을 닮았다 해 가뫼산으로 불리는 산과 함께 맞은 편에 각시가 오른 발을 구부리고 왼발을 쭉 펴서 마을을 옹위하고 있는 형세의 각시 산으로 둘러 싸여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각시 산 정상에는 지금도 바위에 말발자국이 남아있고 가마가 쉬어가는 터로 보이는 흔적이 잔존해 있다. 그러나 산업화의 물결이 빼어난 산세를 깎아 지르는 안타까운 모습은 이 마을이라 해 예외가 아니다. 소치-오천간 도로개설공사가 산자락을 허물고 관통하고 있다.

도로개설을 두고 주민들은 지난 2005년 4월 마을을 보호하는 산세를 살리기 위해 터널공사를 원하는 집단민원을 여수시에 제기했으나 시·도비로 실행하는 적은 예산으로는 불가하다는 회신을 받고 말았다. 산이 깎여서일까. 마을의 불행은 바로 찾아오고 말았다.

신덕동 218세대의 전통적인 주요 생업은 20%를 차지하는 농사보다 마을 앞에 탁 트인 바다를 무대로 주민 80%가 어업을 주업으로 삼았었다. 3톤 미만의 소형선박들에 의해 주로 연승(延繩)이나 자망·통발로 불리는 이 어업은 평화로운 주민들의 주 소득원이었으나 여수 산단으로 드나드는 대형선박들의 항로확장과 개항장 등으로 말미암아 점차 그 해역을 넘겨주고 말아 지금은 200여척의 선박들이 포구에 발이 묶여 있는 안타까운 형편이다.

“정부의 감척사업 계획에 따른 보상책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2005년부터 한시적으로 2008년까지 연안어업 감척사업이 실시되지만 해양수산부에서 배정되는 그 숫자가 극히 적을뿐더러 폐선보상금 이나 선체가격산정 등이 실제와는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되기에 그나마 신청할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더 많은 숫자 배정과 현실성 있는 보상책이 아쉽습니다.” 이 마을 대표인 조현근 (趙 顯根·59)씨의 말이다.

그는 바람직한 마을의 미래상에 대해 수려한 경관의 해안과 산이 어우러진 테마 관광코스개발도 연구해볼 일이라고 강조했다. 마을에는 금영 김 씨와 함안 조 씨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마을을 지키고 있다. 전 대법관을 지낸 김 행산 씨가 이 마을 출신이고 조 삼랑 전 서초경찰서장이 또한 이 마을이 고향이다.

/기사제공 = 까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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