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고 관점만 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고 관점만 있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24.03.22 09: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97
신병은 시인

창조는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시 들여다보고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고, 있는 것들을 다시 편집하여 또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에디톨로지다.

없는 것을 만드는 일은 창조주인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성경의 첫 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며 창조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첫째 날은 빛은, 둘째 날은 하늘을, 셋째 날은 땅과 바다를, 넷째 날은 낮과 밤을, 다섯째 날은 새와 물고기와 온갖 생명, 여섯째 날은 당신의 생김을 닮고 당신의 사고를 닮은 인간을 만든 후 일곱째 날은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창조물에 이름을 붙였으니 최초의 시인은 하나님이다.

창조는 이처럼 있는 것을 재발견한 것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 즉 명명작업이다.

시창작도 마찬가지다.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의 외적, 내적 또 다른 모습을 재발견하는 일이 시 창작이다.

이때 재발견을 하는 비결이 있다면 ‘관점’이다.

관점은 사물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는 입장이나 생각하는 각도(角度). 견지(見地)로 시간과 공간, 가치관, 인생관을 내포하는 통섭의 안목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단 순간도 똑 같은 모습은 없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정답이 아니라 관점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 자체도 모두가 관점이다. 행복도 불행도 가치관도 인생관도 관점이다.

창조, 시 창작이 대상을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관점에 주목한다.

 

벌레먹은 나뭇잎 –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

국화 – 내 누님같이 생긴 꽃

만찬 –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나들목 – 전방 2킬로미터, 이제 생의 속도를 좀 줄이세요

옹이 – 바람의 기슭에 단단한 집을 짓는 일이다

물들다 – 네 것과 내 것을 받아주고 내어 준 흔적

입춘 – 그땐 서로 따뜻해 져야죠

울돌목 - 한쪽이 한쪽을 보듬는 일이 아프다고 난리다

버팀목 –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낙화 –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골다공증 -하늘나라 먼 길을 몸 가벼이 날기 위해 어머니는 지금 몸을 비우시는 중이다–

 

시는 이처럼 재발견이다.

이생진 시인은 ‘벌레먹은 나뭇잎’에서 ‘남을 먹여가며 산 흔적’을 발견하였고, 서정주 시인은 ‘국화’에서 ‘불혹의 나이에 자기를 성찰하는 누이’의 모습을 발견하였고, 함민복 시인은 이웃이 보내온 ‘김치 한사발’에서 ‘마음이 마음을 먹는’ 만찬의 의미를 발견하였고, 복효근 시인은 ‘버팀목’에서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댄 모습을’ 발견하였고, 문숙시인은 ‘울돌목’에서 두 갈래의 물길이 합수하는 모습에서 ‘ 한쪽이 한쪽을 보듬는 아픔’을 발견하였고, 이형기시인은 ‘낙화’에서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발견했고, 필자는 ‘골다공증’에서 ‘하늘나라 먼 길을 가볍게 날기 위한 준비’임을 발견했다.

이 모든 발견은 관점을 달리해서 바라본 결과다. 결국 시창작은 사물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다


나무를 나무라 하지 못했습니다

풀을 풀이라 하지 못했습니다

꽃을 꽃이라 하지 못했습니다

바람을 바람이라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리석어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나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문득, 지나치다

나무와 풀과 꽃과 바람을 오래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나무를 나무라고만 할 수 없었습니다

풀을 풀이라고만 할 수 없었습니다

꽃을 꽃이라고만 할 수 없었습니다

바람을 바람이라고만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어리석어

사랑을 사랑이라고만 우길 수 없었습니다

나를 나라고만 우길 수 없었습니다 -신병은 < 나는, 어리석어>

 

나무와 꽃과 풀과 바람이 사전적인 의미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나무가 아닌 다른 삶의 모습으로 보인다. 고지식하게 있는 그대로만을 보아서는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 창작은 낯익은 것이 낯설어지는 메타포에서 가능하다.

생각해 보면 내 안에도 수많은 낯선 내가 있다. 물론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직장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나의 모습도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상황에 따라 파악되는 내용이 다르고 주위환경에 따라 내용이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면 똑 같은 한사람의 얼굴인데 그 뒤 배경이 무엇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얼굴의 이미지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배경을 수프가 보이면 배고픈 사람의 얼굴로 보이고, 요염한 여자를 배경으로 하면 엉큼한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

관점은 의도적이고 적극적ㅇ드로 자신의 일상에 관여하는 행위이므로 시각에만 의존하지 말고 모든 감각, 가치관, 세계관, 역지사지의 상황까지 고려하여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이 문득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고 그 낯선 모습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고, 그것이 곧 시의 내용이 된다.

아무도 보지 못한 삶의 이야기,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은 삶의 이야기가 된다.

 

봄빛 무성한

별꽃, 쇠별꽃, 주름잎, 괭이눈, 까마중, 달개비....

누구에게는 꽃이고

누군가에게는 잡초다 -신병은 <꽃, 혹은>

 

세상은 누군가에게는 잡초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꽃이 된다.

시를 쓰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살면서 만나는 생각의 각도와 시선의 방향이 바로 시고 수필이고 소설이다.

알고 보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웃고 울며, 생각을 나누면서 매일매일 몇 편의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수필을 쓰고 있다. 그리고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머리로 생각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그때 그때 줍는 것이다.

다만 시간과 공간과 세계관에 따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관점의 문제이기에 관점을 달리하면 화법도 달라지게 마련인데 시적 표현도 마찬가지다.

 

나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 도와 주세요.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런데 저는 볼 수가 없답니다.

왕자들이 전하보다 빨리 죽겠습니다

왕자들보다 전하께서 더 오래 살겠습니다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신에게는 전선 12척 밖에 없습니다.

 

위의 화소는 같은 내용이면서 또 절대로 같은 내용은 아니다.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차이에 의한 화법으로 이러한 화법도 알고 보면 관점의 결과인 셈이다.

모든 시는 관점에서 바라본 의미체험, 풍경체험이다.
예를 들면 ‘나뭇가지를 당겼다 놓으면 팽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원리를 인문학적 관점, 자연과학적 관점, 사회과학적 관점으로 보면 다양한 의미체험을 할 수 있다.
즉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관성의 법칙’을 보게 되고, 인문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부드러움의 힘, 원래의 제자리를 기억하는 힘, 초심을 잃지 않은 힘’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가져야 할 몸가짐이나 행동안 ‘처신處身’의 원리를 이 상황에 오브랩할 수 있다.

창작은 이런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