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자연(無爲自然)에 눈과 귀를 기울여라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눈과 귀를 기울여라
  • 남해안신문
  • 승인 2024.02.2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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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96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완전함이란 채워가는 과정이 아니라, 비우고 비워서 더 이상 비울 것이 없는 상태다

시는 삶의 풍경체험 느낌이 몸속으로 들어와 글을 통해 몸 밖으로 나가는 언어예술이다. 언어예술로서 시적 언어부림은 대상과 현상에 가장 알맞은 말을 찾아 쓰는 능력이면서, 문학의 장르 중에 가장 언어의 경제원칙과 디자인의 개념이 적용되기도 한다.

시적언어 디자인은 알맞은 말을 찾아내는 발견과 적용임은 늘 강조한 바다.

그런데 오늘날 디자인의 개념은 ‘비우는 일’이면서,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이다. 삶의 디자인도 그렇고 공간디자인도 그렇고 시적언어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비우면 비울수록 넉넉해지는 덜어내는 디자인이다.

나를 비워 대상과 세계를 만나는 기분 좋은 일이고 맑아지고 넓어지는 일이다.

완전함이란 채워가는 과정이 아니라, 비우고 비워서 더 이상 비울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고 했다. 꼭 할 말만 하라는 것이다.

표현법에는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표현이 있다.

비언어적 표현은 언어 이외의 동작언어로 자세, 나 표정과 손짓, 눈짓 등의 몸짓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이다.

시적 표현에서 비언어적 표현은 내가 본 상황을 그대로 그려서 보여주면서 내가 느낀 감정을 독자들 스스로 느끼도록 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말하는 즉, 이미지image다. 그래서 산책의 매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걷는 즐거움이고, 롤랑바르트 <밝은 방>의 낡은 사진 한 장이 주는 특별한 느낌이고, 아이와 엄마의 행복한 눈맞춤이다.

이미지는 보여주는 것으로 들려주는 법이다

예술은 삶의 디자인이다.

신윤복의 ‘월하정인’도 김홍도의 ‘상박도’도 그렇고 시와 소설도 삶의 풍경을 디자인한 것이다.

디자인의 생명은 무조건 비워서 표현하는 것만 상수가 아니라 최소의 언어로 독자의 이해와 공감력을 얻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자다가 봉창 두드리고 남의 다리를 긁어주는 일이 독자의 마음을 다독이고 공감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가 왜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나?

아무 생각 없이 생각도 없이

붉은 꽃 더 붉게 우수수 떨어지던

아, 그때 그날 -신병은 <동백꽃지다(1019여순사건)>

 

시집 <꽃, 그 이후>에 실린 여순1019사건에 관한 시다. 짧지만 여순사건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할 말을 하고 있다. 가장 멋있을 때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이 우수수 떨어지는 풍경에 여순1019의 상징인 ‘손가락총’의 의미를 오브랩하여 그날의 아픔을 보여주고자 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할까 싶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세계로,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미 자연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들이다. 그런 자연의 생각과 표정, 그리고 자연이 속삭이는 말들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를 재현한다. 그동안 시인들은 동백꽃 피고 지는 일상에 담긴 참으로 많은 삶의 이야기를 듣고 읽었다. 이형기 시인은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윤제림 시인은 ‘노동현장의 아픔’을 보았고, 유안진 시인은 ‘겨울 뜨락의 한자루 촛불을 켠 시인의 신혼’을 보았고, 이해인 시인은 ‘종일 바다를 안고 우는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시창작은 이점에서 세상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의 문제, 어떻게 새롭게 접속할 것인가의 문제다,

 

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
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나비 쪽을 외면하는
늦은 오후
-복효근 <따뜻한 외면>

비오는 날 나뭇가지 위에 날아든 새가 비를 피해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비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그것도 시장기가 맴도는 늦은 오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대상의 관계성이 따뜻하게 오브랩되는 이유는 시의 제목이 ‘따뜻한 외면’이기 때문이다.

할 말만 하고 있는 짧은 시다,

장자는 가장 이상적인 말은 불언不言의 말이라 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안해도 알제’라는 말,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화법으로 자리하게 된다.

위의 시도 짧지만 그 풍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독자에 따라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로 다가갈 것이다.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농사는 사람이 짓는 게 아니라고

하늘이 짓는 거란다

꽃도 하늘이 피우는 거란다

바람과 햇살 구름과 비를 보내 꽃을 피운단다

사람의 마음에도 빛과 어둠과 새와 물고기와 낮과 밤과

사랑과 꿈과 그리움을 보내 꽃을 피운단다

오랜 무위자연 영농법이다

생존보다는 삶을 위해

하늘이 준 시간을 밑거름으로 내어란다

가끔은 내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내 영혼의 메시지를 화분花粉으로 날리란다

별빛으로 반짝이는 내 마음

아침이슬로 내려

꽃을 닮은 꽃 한송이 피우란다 -신병은<무위자연 영농법>

아버지의 농사법은 무위자연의 농사법이다.

아버지가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다 하늘이 짓는 것임을 헤아린다. 농사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도 빛과 어둠과 새와 물고기와 낮과 밤과 사랑과 꿈과 그리움을 보내 꽃을 피운단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스스로 혹은 저절로 그러하다’는 의미로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이다. ‘無爲而無不爲’ 즉 ‘하지 않아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자연이다.

인간중심적은 분별을 하지 말고 순리를 따르면서 자유로운 삶으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모든 것이 자연이고 순리이기에 시창작은 자연의 원형심상을 살피고 하늘의 순리를 살피는 일이다.

 

비로소 자유란다

꽃봉오리도 자유란다

새도 자유란다

나무도 자유란다

모든 첫 경험도 자유란다

심장의 상상도 자유란다

비로소 자유가 된 것들이

서로 물들며 살아야할 세상이란다

한 호흡으로 건너야할 길이란다

포기할 것 포기하고 버릴 것 버리란다

그래야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춤이 되고 노래가 되고

꽃에 닿고 나무에 닿고 하늘에 닿는단다

스스로 황홀해지는 거란다

경계를 지우고 저쪽으로 건너는 거란다

내 안에 반짝이는 내 별을 보는 거란다

버리는 것이 자신을 섬기는 아름다운 일이란다

자신을 느끼는 거란다

비로소 사랑이란다 -신병은<비로소 자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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