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적 메타포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적 메타포
  • 남해안신문
  • 승인 2023.12.29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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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95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과학자가 그림을 그리면?

과학자가 미술가들의 공간을 가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발제는 물리학자 김성욱과 타이포그래퍼 유지원이 펴낸 「뉴턴의 아틀리에」에서 두 시선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즉 타이포그래퍼와 물리학자가 서로 다른 영역의 연결고리는 찾기 위해 자유롭게 서로의 학문을 넘나드는 다양한 통섭의 이야기다.

26가지 동일한 주제에 대한 두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되 결국은 하나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리학과 인문학의 자유로운 통섭이자 이종교류다.

먼저 두개 시선을 정리해 보면

 

☞분과학문 체제에서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것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상象을

왜곡시키고 분리시키는 경우가 있다. 사실은 미술의 영역이기도 하고 동시에 과학의

영역이기도 해서 두 시선들이 합쳐져야만 그 상이 제대로 보인다.

☞우주공간에는 학문의 꼬리표가 없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예술 등 모든 것이 한 영역 안에 존재한다.

☞예술이 논리적이고 과학이 감성적이다. 서로의 교집합이 넓다.

☞당위에 저항하고 편견에 질문하고 다양성을 각별하게 존중하고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열어둔다.

☞인간이 언어로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예술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리는 시다. 사물의 이치는 때로 단 한 줄의 수식이나 한마디 문장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우주의 시'라 부른다.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예 존재조차 할 수 없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자연 그 자체라는

것인데 자연이 아니면 존재할 수가 없으므로 존재 자체가 즉, 자연인 것이다.

☞중력에 의한 물체의 낙하 자체는 아름다운 일도 불행한 일도 아니다. 낙하하는 것이 낙엽일 때

아름답고, 유리잔일 때 불행하다. 가치는 인간이 임의로 부여하는 것이다. ​​

 

시창작도 예외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새로운 상상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영역과 소통하는 보는 방식을 달리할 수 있어야 한다. 관점, 유추, 통찰, 통섭, 연상 등도 보이는 것 너머를 보기 위한 장치다.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봐도 세상은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인 전체 안에서 개개의 존재가 제 모습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하나의 존재 안에 서로의 존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통해 저것을 본다’는 논리가 대상의 경계를 초월하여 성립하게 된다. 꽃을 통해 그리움과 열림의 의미를 보고, 풀을 통해 민중의 강한 삶의 정신을 보고, 겨울강을 통해 진정한 배려를 읽어내고, 벌레먹은 나뭇을 보면서 남을 먹여가며 살아온 흔적을 읽어내고, 겨우살이를 보면서 얹혀사는 삶을 더듬어 낸다.

상상력은 없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떠올려서 재발견하는 낯설기 하기다. 스티브잡스가 오늘날은 편집이 권력인 시대, 편집자가 권력자라고 하는 까닭이다.

창의력(C) = f(k,m,v,c,t)
knowledge, Motivation, Variety, Child’s mind, Technique
1) 양질의 폭넓은 지식을 흡수하라
2) 타인의 지식에 자신을 것을 융합해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라
3) 의심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라(Ctrl C 와 Ctrl V)

결국 세상의 모든 창작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섭이다.

원래 우주 공간에는 대상을 경계지우는 학문의 꼬리표가 애초부터 없었다. 모든 경계는 인위적인 것이고 때로는 예술이 더 논리적이고 과학이 더 감성적이다.

그래서 나 역시도 자연의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자연과 더불어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개심사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일까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

꽃이 맑다

매화나무는 목탁 두드릴 때마다

꽃잎으로 법구를 읊고,

청매화는 동안거 끝에 수피의 끝을 찢어

꽃망울 터트린다

저토록 신심(信心)을 다져왔기에

봄이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가지마다 허공으로 낸 구도의 길

제각기 가부좌 틀고 참선의 꽃들을 왼다

전각에서 내리치는 죽비소리

제 몸 쳐대며 가람으로 흩어지는 풍경소리

합장하듯 꽃잎들 맞이하고 있다

법당은 꽃들의 백팔배로 난분분하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

- 2023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이수진<청벚 보살>

 

잘못된 마음을 고친다는 개심, 개심사의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는 화두부터 시선을 잡아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스님이 목탁을 두드릴 때 한잎 한잎 꽃잎이 열리고, 봄을 부르려고 꽃이 핀다. 꽃이 피고 핀 가지마다 허공에 구도의 길을 연다. 죽비소리에 풍경소리가 가람으로 흩어지고, 조용한 산사가 야단법석이 된다.

청벚나무에 꽃이 만개하는 자연과학에 안겨있는 구도수행자의 깨달음을 향한 발원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는 깨달음의 형상화가 선명하게 오브랩된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갔다. 바람 한 잎과 구름을 벗겨낸 햇살도 꺾어 넣었다. 봄 논의 개구리 울음도 잡아다 넣었더니 비로소 항아리가 꽉 찼다.

나흘 밤의 고요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항아리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저 경건한 나흘, 지나가는 빗소리도 발끝을 세우고 갔으며 파란색 바람이 일렁이다 갔으며 또한 파란 별들이 농부의 발목 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갔다.

항아리 속에서 적막의 힘이 차오른다. 씨앗들이 뿜어내는 발아의 열, 항아리가 드디어 익어가기 시작한다.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도란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씨나락경전을 듣는다.

적막은 발아의 요람

작은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우주가 발아하고 있다.   -김우진<농림6호>

 

위의 두 편의 시는 자연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안목이 잘 반영된 시로 평가된다.

이처럼 시 창작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통해 ‘어떤 삶’을 성찰해내는 일이다.

아무튼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경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만나야 한다는 점이다. 여행의 진가는 수많은 풍경을 같은 눈으로 바라볼 때가 아니라, 다양한 시선으로 같은 곳을 바라볼 때 드러난다(The voyage of discovery consists not in seeking new lendscapes but in having new eyes)말처럼 시창작도 다양한 시선으로 새로운 의미를 깨우쳐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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