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유관순…“여수 윤형숙 열사 재조명해야”
남도의 유관순…“여수 윤형숙 열사 재조명해야”
  • 마재일
  • 승인 2023.12.2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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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평 의원 주최 토론회 개최
​​​​​​​기념관 건립 등 기념사업 필요
 윤형숙 열사.(왼쪽 사진 빨간색 원안) 자료=남도역사연구원
 윤형숙 열사.(왼쪽 사진 빨간색 원안) 자료=남도역사연구원

여수시가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83명을 발굴 선정해 홍보하고 있는 가운데, 여수시의회에서 ‘남도의 유관순’이라 불리는 윤형숙 열사 재조명을 위한 논의가 마련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19일 의회 소회의실에서 박영평 의원 주최로 ‘의혈지사 윤형숙 열사 재조명을 위한 기념사업 제안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시의원, 시 정부, 여수지역 독립운동가유족회 관계자 및 종친회 회원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토론회에서는 여수지역 독립운동가유족회 관계자들이 윤형숙 열사의 약력을 소개하고 재조명 필요성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 윤형숙 열사는 만세 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의 무력 진압 작전으로 오른쪽 눈과 왼쪽 팔을 잃었지만,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오른쪽 손으로 다시 들고 만세 운동을 이어갔다. (그림=남주영 작가)
▲ 윤형숙 열사는 만세 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의 무력 진압 작전으로 오른쪽 눈과 왼쪽 팔을 잃었지만,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오른쪽 손으로 다시 들고 만세 운동을 이어갔다. (그림=남주영 작가)

설명에 따르면 윤형숙 열사는 1900년 9월 화양면 창무리에서 윤치운의 3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나 1918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진학했다. 윤 열사는 1919년 3월 10일 재학 중 광주 봉선시장 만세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일본 경찰의 무력 진압 작전에 따라 오른쪽 눈과 왼쪽 팔을 잃었지만,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오른쪽 손으로 다시 들고 만세 운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징역 4개월과 4년 연금형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 1927년 3월 고창 교회 내 유아원, 부녀야학을 설립해 국민계몽운동을 하다가 1939년 고향 여수로 귀향, 여수제일교회와 여수중앙교회 전도사로 사역했다.

▲ 여수시 화양면에 조성된 윤형숙 열사의 묘. (자료=남도역사연구원)
▲ 여수시 화양면에 조성된 윤형숙 열사의 묘. (자료=남도역사연구원)

윤 열사는 반공청년운동을 하다가 1950년 9월 28일 여수시 둔덕동에서 인민군에게 집단학살을 당해 순국했다. 다음날인 9월 29일 피살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해 화양면 창무리 산81번지에 안장했다. 이어 1960년 3월 23일 윤형숙의 묘를 창무리 80번지로 이장하고 10년간 방치한 비석을 다시 세우고 묘비제막식을 거행했다.

정부는 1963년 10월 2일 반공청년운동 표창장을, 2004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2020년 6월 ‘이달의 여성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여수시는 2013년 묘지 정비사업과 함께 2019년 9월 27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윤형숙 열사 학술 세미나 및 추모제를 개최해 지역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조명했다.
 

▲ 여수시의회는 지난 19일 의회 소회의실에서 ‘의혈지사 윤형숙 열사 재조명을 위한 기념사업 제안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진=여수시의회)
▲ 여수시의회는 지난 19일 의회 소회의실에서 ‘의혈지사 윤형숙 열사 재조명을 위한 기념사업 제안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진=여수시의회)

이날 참석자들은 윤 열사의 위상을 높이고 활약상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여수시가 다양한 방법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박영평 의원은 “아산의 유관순처럼 많은 사람이 윤 열사의 삶을 기리고 추모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윤형숙 열사 기념관 건립, 기념사업회 설립을 통한 다양한 콘텐츠 제작 및 이를 활용한 홍보 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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