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해상도解像度를 높여라
언어의 해상도解像度를 높여라
  • 남해안신문
  • 승인 2023.09.15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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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90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언어는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이다.

그만큼 언어가 그 사람의 모두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는 그대로 그 사람의 무늬가 된다,

그래서 예부터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인물을 고르는 표준으로 삼았다. 네 가지는 사람의 됨됨이를 가름하는 신수· 말씨· 문필· 판단력을 두고 이름이다.

그리고 이청득심(以聽得心), 과언무환(寡言無患), 언위심성(言爲心聲)이라 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괜찮아 잘 될 거야’처럼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말이 공감을 주기도 한다. 공감화법이야말로 시의 화법이고 수신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화법이다.

시의 화법은 어떤 말을 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고, 어떻게 말하느냐보다는 어떤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시에서는 설명과 부연이 필요없다는 점에서 입을 닫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잘 말할 수 없다.
최고의 디자인된 말은 세계를 알아가는 가슴 떨리는 관계의 인문학이다.

 

‘꽃은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어야 한다’

‘봄이 번져 여름이 되고 여름이 번져 가을이 된다. 꽃이 번져 열매가 된다. 번져야 사랑이다’

‘누구에게는 꽃이고 누군가에게는 잡초다’

‘한번이라도 꽃을 피운 생은 지더라도 영원히 꽃이야'

 

이렇게 보면 ‘꽃이 지다’의 의미, ‘번지다’의 의미, ‘꽃과 잡초’의 의미, ‘꽃이 피다’의 의미가 재생산되고 있다. 언어는 이렇게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회과학 용어가 서로 통섭하여 의미를 확장하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낸다.

언어의 창조는 하이브리드 소통, 발칙한 만남, 콜라보레이션에 의해 가능하다.

시인은 그렇게 해서 이렇게 나만의 언어, 나만의 언어사전을 마련해 간다. 즉 식물성 아침, 우아한 제국, 꽃을 번역하다, 아홉 살의 조팝꽃, 바람굽는 법, 맛있는 침묵... 등의 언어 간의 통섭이 가능해진다.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
이상국<쫄딱>

 

‘쫄딱’이란 말의 의미가 이렇게 확장된다. 계집아이의 ‘쫄딱 망했다’는 한마디에 골목이 넉넉해지고, 이사온 집이 친척처럼 느껴지는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한 말임을 알려준다.

시는 말의 힘에 기댄다.

그래서 입술의 언어보다는 마음의 언어다,

어떻게 하면 언어의 보수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언어를 향해 갈 수 있을까.

삶의 답답함을 벗어나는 길은 새로운 언어를 찾는 일이다.

그래서 독창적인 글쓰기는 융합에 의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창조적작업이고, 인식의 한계를 깨뜨리고 새로운 언어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언어를 새롭게 창조하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다.

융합은 초월적 위치에서 여러 가지 지식을 합하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해 필요한 실천으로 옮겨가는 이동의 사고이자 해결을 찾는 전술적 사고(實事求是)다(정희진의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비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꽃살문 스치는 바람소리를 냅니다 - 공광규<무량사 한 채>

 

무량이란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어처구니없는 아내의 말에 또 어처구니없이 ‘무량한 만큼’이란 말을 뱉어낸 그날 이후에 아내는 무량사 한 채라는 생각이 되는 순간에 시적풍경이 펼쳐지게 된다.

무량이라는 한마디가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내고,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꽃살문 스치는 바람소리를 낸다’는 시적풍경으로 가는 길목이 된다.

언어에도 해상도(鮮明度)가 있다.

해상도는 텔레비전 화면이나 컴퓨터의 디스플레이 따위에 나타나는 물체의 선명도다.

시적표현은 말의 해상도를 높이는 표현법이다. 해상도를 높이는 방법은 그 상황, 그 대상에 가장 알맞은 말을 찾아 쓰는 일이다.
예를 들면 ‘보다’란 말도 위치에 따라서는 ‘내다보다, 들여다보다, 넘어다보다, 넘겨보다, 바라보다, 굽어보다, 쳐다보다, 올려다보다, 우러러보다, 낮추어보다, 깔보다’ 등에서 어떤 말을 골라 쓰야 하고,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돌보다, 엿보다, 노려보다, 쏘아보다, 흘겨보다, 째려보다, 눈여겨보다, 거들떠보다, 훑어보다, 뜯어보다, 따져보다, 헤아려보다, 사보다, 살아보다, 죽어보다, 나눠보다, 꿰뚫어보다, 알아보다’ 등에서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말을 골라 쓰는 일이 말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이다.

 

나는 무엇인가 부드럽고 연한 것이 내 어깨 위에 가볍게 얹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리본과 레이스 ,그리고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스치면서 내게 기대어 오는, 잠들어 축 늘어진 그녀의 머리였다.
그녀는 하늘의 별들이 솟아오르는 아침 빛으로 지워져 흐려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나는 가슴속이 약간 두근거렸지만, 내게 아름다운 생각만을 보내준 이 맑은 밤에 의해 성스럽게 보호를 받아 고이 잠들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별들 중 하나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아 잠들고 있다고 몇 번이나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알퐁스도데의 소설 <별>의 결말 부분이다. <별>은 강물이 불어 어쩔 수 없이 산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때묻지 않은 맑고 고운 작은 사랑이야기다.

별이야기를 하다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스테파느터 아가씨, 아가씨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주인집 아가씨가 아니던가,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심장이 멎을 것 같았지만 ‘밤하늘의 별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깨위에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더 순수하고 맑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을까 싶다.

언어의 해상도가 빛나는 구절이다.

 

들어본 적 있나요? 바람에도 젖가슴이 있다는 것을
한적한 도로에서 강물을 옆자리에 앉히고
시속 70킬로로 달리면서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보세요
말랑말랑한 바람의 젖가슴이 만져질 거예요
그 바람의 젖을 먹고 풀들이 자라고
침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상처들을 꺼내 말리면서 꽃잎들이 피어나요
흔들리면서 갈대는 생각이 깊어지고 땅 속에서 감자는 굵어져요
온통 계절을 키우는 것은 바람이예요

-정용화 <바람의 젖가슴>

 

이 시 또한 언어의 해상도가 높은 시다.

달리는 차창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만져보게 되고 그것도 ‘바람의 젖가슴’을 확인하게 된다. 그 인식의 순간에 풀들이 바람의 젖을 먹고 자라고, 꽃잎들도 바람의 젖을 먹고 피어나고 땅 속 감자가 굵어진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럴 것 같다는 공감에 이른다.

공감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상황과 대상에 적합한 언어를 선택하여 사용함으로써 언어의 해상도를 높였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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