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의 관점(觀點)은?
시 창작의 관점(觀點)은?
  • 남해안신문
  • 승인 2023.08.2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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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89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세상의 모든 창조는 관점의 문제다. 하긴 어디 창조뿐이냐 마는 모든 생각의 차이, 상상력의 차이 등 ‘차이’는 관점의 문제다.

5분의 시간도 내가 보고 싶은 사람과 만나 차 마시는 5분과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마주 앉은 5분이 다르고, 장미원에 있는 수많은 장미속의 한송이와 하얀 식탁보가 깔린 식탁위에 꽂힌 장미 한 송이가 다르다.

관점, 관점을 달리해서 보슨 법이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방법이다.

다른 생각을 스케치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원리다.

이렇게 볼 때 공부는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하는 것이고, 안경을 쓴 이유는 안보여서 쓴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 잘 보기 위해 쓴 것이 된다.

그리고 진보의 반대말은 보수가 아닌 ‘공부’가 된다는 말에 동의할 것이다.

시 쓰기는 그런 관점의 틈새에서 가능하고, 대상과 현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본 의미체험, 풍경체험이다.

그러면 시창작의 관점은 어때야 할 것인가?

긍정의 힘을 믿는 플라시보 관점, 그리고 자연과학적 점과 인문학적 관점등의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다. 시의 관점은 무엇보다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삶의의미체험을 하게된다.

예를 들면 나뭇가지를 당겼다 놓으면 ‘팽’하고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가는 현상에 대해 자연과학적 관점에 의하면 관성의 법칙으로 이해하지만, 이를 인문학적인 관점에 의하면 ‘부드러움의 힘, 원래의 제자리를 기억하는 힘, 초심을 잃지 않은 힘’을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부드러운 것은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의 힘임을 이해할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면서 개화사상가인 박규수(1735~1805)에 의하면 세상의 추이를 보는 눈으로 예술은 보는 눈은 높아야 하고, 역사를 보는 눈은 깊어야 하고, 정치와 경제를 보는 눈은 넓어야 하고, 미래를 보는 눈은 멀어야 한다고 했다.

시 창작은 눈은 이런 네 가지 관점이 다 필요한 통합적 관점이어야 한다. 네 개의 관점에 의해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것이다.

2016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일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특별전이 생각난다. 그 특별전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1400년 만에 만난 ‘사유’의 관점이다.
1400년 전 동시대에 한일 양국에서 따로 제작한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 중궁사 목조반가사유상의 ‘사유’가 한자리에 만난 사건이다. 사유에 든 보살의 무한한 평정심과 숭고한 아름다움의 금동반가사유상과 두툼한 눈과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어 명상에 잠긴 모습의 목조반가사유상이 서로 마주보며 어떤 생각을 나누었을 지가 참으로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기획의 출발점도 질문과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특별전이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도 전시를 기획한 사람의 안목과 관점이었다.

창조는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 질문 또한 어는 관점에서 하느냐에 따라 평범하거나 위대한 창조가 될 수 있다.

왜? 이 한음절의 물음이 세상을 창조해 왔다.

그래서 시창작의 시작은 질문이고 좋은 시는 언제나 질좋은 질문의 결과물이다.

‘올 봄은 왜 이렇게 더디게 올까?’ 라는 질문에서 이성부 시인의 <봄>이 나왔고, ‘거실 고무나무 잎을 닦으니까 시커멓다, 왜 그럴까?’라는 질문에서 윤효 시인의 <도둑 제발 저리다>가 나왔고, 또 ‘한 사람이 내게로 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라는 질문에서 정호승 시인의 <방문객>이 나왔다. 꽃의 뒤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라는 시에서 이형기시인의 <낙화>가 나왔다.

이처럼 시 창작은 대상과 현상의 어떤 쪽을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아인슈타인도 ‘나는 특별한 재능이 없습니다. 열렬한 호기심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질문의 다른 말은 호기심, 상상력, 통찰력이 되는 까닭이다.

 

날이 밝자 아버지가 모내기를 하고 있다

아침부터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다

비온 뒤 들녘 끝에 두 분 다 부지런하시다 - 정호승<들녘>

 

이 시의 관점이 되는 중요 키워드는 ‘두 분 다 부지런 하시다’에 있다. 아침 일찍 모내기를 하고 있는 아버지와 아침부터 거미줄을 치고 있는 먹왕개미을 동격의 위치에 두고 보는 관점이다. 시 창작은 자연과의 협업이고, 자연의 현상에 안겨있는 삶의 모습을 탐색하고 통찰하는 일로 자연에 대한 인문학적인 사색이며 통합적 이해다.

 

우르르 우르르 굴러다니는 / 나뭇잎 저 소리들

한 잎의 소리를 내려 발목을 덮는다

한 잎의 따뜻한 햇살을 담아 발밑에 넣는다

저를 버려 따뜻함을 펴는 / 나무의 떨어진 잎은 봄의 밥이다

나뭇잎이 뒹군다는 것은 / 이웃을 향해 베푸는 고요한 나눔

풀의 밥, 꽃의 밥, 산의 밥이 되고

바람의 소리까지 배불린다 - 신병은<나뭇잎 밥>

 

가을이면 나뭇잎이 떨어져 나무의 발길을 덮어주고 우르르 바람에 날려다니는 소리를 듣는다. 썩어 거름이 되고,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는 이불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런 생태학적인 현상에 안겨있는 인문학적의미로 ‘봄의 밥’이라 본 것이다. 그래서 풀의 밥이 되고, 산의 밥이 되고, 나무의 밥이 되고 끝내는 바람의 소리까지 배불리고 있다고 본 것이다.

자연이 진정한 인간의 스승이고, 시의 스승이다.

 

한산사 은행나무에 까치가 집을 짓는다

허공에 터를 잡고 바람 한 올 한 올 물어 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 서까래를 올리고 용마루까지 올린다

못질 한 번 없이 부리 하나로 / 한 올 한 올 햇살로 감아 틈새를 엮는다

수십 번을 끼우고 맞추면서 /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허공을 깁는다

은행나무 마구 흔들리는 바람 부는 날이다

태풍에도 견딜 수 있는 새들의 집, 햇살과 바람으로 집을 짓는다

햇살의 집을 짓는다 / 바람의 집을 짓는다

부처보다 더 맑은 새들의 명리가 / 하늘 품 안에 바람의 절간을 짓는다

- 신병은<까치집 짓다>

 

자연의 위대함을 잘 들여다보면 그 속에 위대한 시가 안겨 있다. 까치는 집을 지을 때는 비오고 바람부는 날을 택해서 집을 짓는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바람과 비를 집을 짓는 건축재료로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큰 바람이 불어와도 까치집은 견뎌내는 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단 까치집 뿐이 아니다. 개미집, 제비집, 벌집, 새집 등을 보면 가우디도 울고 갈 정도라고 한다,

자연을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체험과 풍경체험을 할 수 있다,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은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미터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손택수 <거미줄>

 

거미와 새끼 거미의 자연과학적 상관관계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모성애’를 들여다 보았다, 그것도 ‘어디 아픈데는 없냐고’ 한밤중에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 한통에 유추된 의미체험이 돋보인다.

좋은 시는 한결같이 자연과학적인 관점에서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상상력이 확장된다.

 

신병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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