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자기 언어가 필요하다
새로운 자기 언어가 필요하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23.07.28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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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88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인간은 건너는 존재다.

이는 ‘살아있는 존재’ ‘질문하는 존재’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질문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하고 건너가가 때문이다.

창작은 기존의 것을 뛰어 넘어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향해 건너는 일이다.

정희진은 그의 책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에서 독창적인 글쓰기를 위한 방법론으로 횡단의 글쓰기, 융합의 글쓰기를 제안한다. 글쓰기는 ‘내 몸을 타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과정’이고, 그런 글쓰기의 핵심적인 방법이 ‘융합’이며, 융합은 흔히 알고 있는 ‘학문 간 대화, 통합, 절충’ 혹은 서로 다른 지식을 합치는 범학문적 접근이 아니라. 지식의 경계를 가로질러 넘어가는 지적 작업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융합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언어가 부재함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결국은 언어문제다.

새로운 언어 만들기는 지식의 경계를 가로질러 넘어가는 지적작업과 인식의 한계, 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려 새로운 세계를 이해할 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대로 살지 말고 사는 대로 생각하라’고 제안한다.

먼저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사는 삶은 이미 그 관념에 갇혀 새로운 의미(언어)를 만날 수 없고, 사는 대로 그때 그때 생각하는 것이 새로운 언어를 만나는 길이라고 한다. 즉 아는 것을 버리고 경계를 넘는 일이 새로운 앎을 만드는 횡단의 사고라 했다.

그래서 진정한 창조인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고 자신의 시간적 공간적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창작은 그림을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답답해지면 지금의 한계를 건너 뛰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나는 일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선을 허물고 공간과 시간, 가치관을 통해 사유하게 된다.

이러한 사유가 낯익은 것들은 다르게 보기 위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고 횡단하는 길이다.

건너가기를 ‘반야심경’에서는 최고의 지혜 즉 ‘바라밀다’라고 한다.

‘바라밀다’는 보살(菩薩)의 수행으로 현실의 생사의 차안(此岸)에서 열반의 피안(彼岸)으로 건넌다는 뜻이다.

견성의 진리를 깨달음도 결국은 건너는 일이다.

지혜롭다는 것은 자유자재로 시간과 공간, 가치관을 가로질러 건너다니는 일이다.

시인은 특히 잘 건너다니는 통섭인이다,

어린왕자는 건너기 위해 살던 곳을 떠난다, 어린왕자처럼 자기생각을 떠나 건너지 않고서는 제 안에 있는 깨달음을 만날 수 없다.

“마음으로 봐야해, 본질적인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법이야”

세상의 모든 진리와 깨달음은 스스로 감동할 수 있는 영혼의 고향을 찾게 하는 모국어가 된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나태주 <시>

 

마당을 쓸었는데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고 꽃 한 송이 피었는데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다는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게 한다. 물론 언어가 주는 힘이지만 보이지 않는 저 너머까지 건너다 본 횡단의 시선 때문이다.

한편의 시가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고, 한 사람의 사랑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아름답게 한다는 생각에 닿게 해준다.

언어의 힘은 횡단하고 건너는 과정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하게 되고, 또 다른 새로운 언어를 향해 건너가게 한다.


이쯤이면 될까.

아니야. 아니야. 아직 멀었어.

멀어지려면 한참 멀었어.

이따금 염주 생각을 해봐.

한 줄로 꿰어 있어도

다른 빛으로 빛나는 염주알과 염주알,

그 까마득한 거리를 말야.

알알이 흩어버린다 해도

여전히 너와 나,

모감주나무 열매인 것을. -나희덕<거리>

 

인간관계는 거리의 문제다.

마음의 거리는 특히 짐작하거나 측량하기 어렵다.

마음의 거리는 심리적 거리이기에 때로는 한 뼘의 거리가 까마득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먼 거리가 지척간일 수 있다. 같거나 다르거나의 문제도 그렇고 생김생김도 빛깔도 삶의 가치관과 관점도 거리의 문제다.

이 다름이 거리의 문제이면서 이쪽과 저쪽의 개념어가 된다.

나희덕 시인의 거리는 서로의 다름을 어떻게 건널 수 있을까의 문제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에 대한 시인의 언어가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당신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차가운 겨울 밤하늘에 비껴 뜬 보름달이 나를 바라보듯
풀을 뜯던 들녘의 소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듯
선암사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새가
홍매화 꽃잎을 쪼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듯
대문 앞에 세워둔 눈사람이 조금씩 녹으면서 나를 바라보듯
폭설이 내린 태백산 설해목 사이로 떠오른 낮달이 나를 바라보듯
아버지 영정 앞에 켜둔 촛불이 가물가물 밤새도록 나를 바라보듯
물끄러미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눈길에 버려진 타다 만 연탄재처럼
태백선 추전역 앞마당에 쌓인 막장의 갱목처럼
추적추적 겨울비에 떨며 내가 버려져 있어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 속에는
이제 미움도 증오도 없다
누가 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사랑보다 연민이 있어서 좋다 -
정호승<물끄러미>
 

‘물끄러미’는 우두커니 한곳만 바라보는 모양으로 건너 바라보기의 말맛을 만난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만나면서 살아가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물끄러미’로 관계를 맺고 기대면서 서로 말을 트고 서로의 표정을 읽는다. 마음 비워 바라보기 혹은 마음 비워 관계하기의 서로 부담없이 건널 수 있는 ‘물끄러미’다.

보름달이 소가 낮달이 촛불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그 자리는 ‘나도 없고 너도 없는’ 혹은 ‘나이면서 너가 되는’ 자리다.

미움도 증오도 없이 사랑보다 연민이 있는 ‘물끄러미’의 시선이 사람과 사람을 건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된다.

창조는 문득 물끄러미 바라보고 건너는 일이다.

익숙한 것들의 낯선 모습을 만나기 위해, 세계를 새롭게 만나기 위해 나만의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새로운 언어는 주류 언어에서 탈출하여 융합과 횡단으로 발견한 새로운 의미의 언어다.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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