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은 없고 새로운 관점만 있다
새로운 것은 없고 새로운 관점만 있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23.06.3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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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87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갈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이 시는 ‘꽃’을 소재로 하여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 즉 상호주체적 만남을 소망하는 존재의 진정한 관계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름이 있다는 것이고 인식한다는 것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창조는 새롭게 인식된 사물에 이름을 불러주는 명명작업命名作業이다.

이름을 알기 전에는 적어도 나에게 존재하지 않다가 이름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나에게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로, 상호만남에서 필요한 것은 상호주체적이면서 본질적인 만남이다.

창조는 새롭게 발견되고 인식된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태어나면서 이름을 갖는다. 즉 존재한다는 것은 이름을 갖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고 보면 인류최초의 시인은 하나님이 분명하다. 성경의 첫 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며 창조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화두를 연다. 첫째 날은 빛을 만들고, 둘째 날은 하늘을, 셋째 날은 땅과 바다, 넷째 날은 낮과 밤, 다섯째 날은 새와 물고기와 온갖 생명을, 여섯째 날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하루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시 창작도 마찬가지다.

시 창작은 대상과 현상의 새로운 의미와 풍경을 발견하여 그에 알맞은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다.

문제는 그 이름은 관점만 달리하면 수없이 많다는데 있다.

그래서 세상은 새로운 것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점만 있다.

관점은 시간과 공간, 가치관, 인생관 등의 개념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어다,

그러고 보면 사는 자체가 모두 관점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관점이 바뀌어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 최고의 행복감을 갖는다.

세상의 모든 시는 관점에서 바라본 의미체험과 풍경체험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4.19혁명으로 한층 부풀었던 자유와 사랑과 양심에의 희망 5.16군사 쿠테타로 일순간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자시는 처지를 자조하면서 불합리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커다란 부정과 불의에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힘없이 나약한 사소한 것에만 분개하는 자신의 소시민적 삶을 반성하고 부끄러워하고 있다.

참여적, 직설적, 반성적, 자조적인 관점으로 현실상황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에 화답하는 관점에서 쓰여진 시가 강은교의 <그대의 들>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들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이시는 위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옹호하는 관점에서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 혹은 ‘사소한 것들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개개인의 사소한 반항이 모여 역사를 큰 물길을 바로잡는 항거가 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렇듯 관점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창조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것을 보려면 어렵지만 관점을 달리해 다르게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창조에는 생산자와 수요자가 함께 동참 한다.

시 또한 시인이 쓰지만 그 시를 완성시키는 사람은 독자다. 그래서 시창작에서 수요자자인 독자의 관점 또한 중요하게 자리한다. 내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장치인 셈이다.

관점은 어떤 가치기준에 의해 내 감각과 가치관을 회복하는 일이다. 내 생각과 관점과는 거리가 먼 편견과 편향된 삶에 휩쓸리는 요즘의 전도된 경향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집단착각’ 혹은 ‘우리편 만들기’의 편견의 패러다임에서 헤어나 자신의 안목을 키우는 일이다. 요즘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가 자기만의 생각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생각에 휩쓸려 따라가는 따라쟁이 삶이다.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는 편견 때문에 참 살기 힘든 사회가 되고, 개인적 편견 때문에 사회적으로 일종의 편향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 생각을 숨기고 남의 생각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반성해볼 일이다.

언젠가 국립박물관에서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의 기획전을 가진 적이 있다. 1400년을 거슬러 한일 양국에서 따로 제작한 국보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 중궁사 목조반가사유상이 한자리에 만나는 기획전이다. 두 불상이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를 생각하면 기획전의 관점이 참으로 매혹적으로 다가온 적이 있었다.

예술가는 미를 보는 안목 이전에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세상의 추이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저서 「안목」에서 ‘예술을 보는 눈은 높아야 하고, 역사를 보는 눈은 깊어야 하며, 정치와 경제와 사회를 보는 눈은 넓어야 하고, 미래를 보는 눈은 멀어야 한다’고 했다.
관점을 제대로 잡을 때 안목이 제대로 갖추어진다.

특히 예술의 안목은 기존의 틀을 깨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대중의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며 예술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안목이다.

세상의 모든 시는 관점의 이야기다.

관련 있으면서도 관련이 없는 관점의 이야기다.

꽃잎 한 장 창가에 남아있는 것은 내가 저 꽃을 마음 따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창가에 여직 남아있는 것은 당신이 나를 마음 따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흰구름이 아직 창틀에 남아 흩날리는 것은 우리 서로 마음의 심연에 심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은교시인의 <꽃을 끌고>는 창틀에 장미꽃잎 한 장이 떨어져 나를 빤히 쳐다보던 어느 날에 쓰였다고 한다.

‘우리는 얼마나 사소한 것들과 함께 사는가’, ‘얼마나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가’하는 사소한 것들의 눈부심을 발견한 관점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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