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디자인은 공감화법이다
언어 디자인은 공감화법이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23.06.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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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86
신병은
신병은

 

화법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고 한다.

언어가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뀌기 때문이다.

언어가 존재라는 말과 같다.

언어가 바뀌면 삶의 프레임이 바뀌고, 프레임이 바뀌면 생각의 혁명도 시작된다.

또한 언어는 생각의 옷이다.

같은 대상과 현상이라고 누가 표현하느냐에 따라 다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고, 그 대상과 현상에 대한 과거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개념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를 떠나 사람마다의 개념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전은 남이 정의해 놓은 사전이 아니라, 내가 체험하고 느끼면서 정의해놓은 나만의 개념사전이다. 거기에는 내 삶의 흔적, 내가 겪은 우여곡절이 다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의 개념어는 내가 경험한 것이 이미지화 되어 저장된 의미의 언어다. 그래서 어휘의 외연적 의미는 같아도 그 어휘의 내포적 의미는 다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에 대한 선험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나만의 언어의 개념적 넓이와 깊이만큼 이해되고 해석된다.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만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표현한다.

공감화법은 수신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화법이다.

그것은 특별한 말이 아니라 누구나 쓰고 있는 말을 가장 어울리게 쓰는 말이다.

예를 들면,

 

저는 장님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 참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하지만 전 볼 수가 없답니다.

나이는 제 가슴에 새긴 인문학경전이다.

안 됩니다 → 생각 좀 해 봅시다, 고민해보겠습니다.

벌레 먹은 나뭇잎 → 남을 먹여가면 산 흔적

겨우살이 → 기대어 사는 삶

홍어 → 한 세월을 푹푹 썩다보면 맛을 내는 시간이 있을 거야

 

이런 화법이 공감화법이고 언어를 디자인 하는 일이다. 말의 디자인은 언어적 기교나 테크닉, 수사적인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과 그 상황에 가장 맞는 말을 찾아 써서 공감시키는 일이다.

배수아 소설 <당나귀들>에 ‘언어의 틈새’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욕망과 사물이 말하고 싶은 의도 사이의 간극을 뜻한다, 그 틈새를 메꿔가는 표현이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출근길에 자동차 문을 여는데 열린 문 아래로 빗방울 맞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작은 쥐손이풀꽃을 본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저렇게 제자리에서 순응하며 웃을 줄을 아는 삶도 있구나,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저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든 그 자리서 가만히 웃을 수 있는 사람'

일상 속에서 문득 만나는 이런 생각이 시의 표현이자 디자인된 공감화법이 된다.

 

고향에서 감자 한 상자를 보내왔다

감자꽃에 앉았던 땡볕도 테이프에 끈적끈적 묻어왔다

호미에 딸려 나온 하지의 낮달과 밭고랑을 지나던 바람도 따라왔다

끼니마다 밥상에 고향의 안부가 올라왔다

어느날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몇 개 남은 감자들이 허공을 향해 하얀 발을 뻗고 있었다

먼저 나가려고 발들이 서로 엉켰다

흙이 그리운 감자들을 화분에 묻어주었다 -<보랏빛 그 꽃잎 사이> 김우진

 

이 시를 보면 시 창작은 쓰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줍는 것, 일상을 재발견하고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보는 것, 또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 일상적 언어를 이해하는 것, 유추하는 것, 자신만의 개념어를 갖는 것, 세계와 대화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향에서 보내온 감자 상자에 고향의 땡볕도 끈적끈적 묻어왔고, 호미에 딸려 나온 하지의 낮달과 밭고랑을 지나온 바람도 따라왔다는 발견의 눈도 그렇고 끼니때마다 공향의 안부가 밥상 위에 올라온다는 생각도 새롭고 예사롭지 않다.

 

우리 집 현관문에는 번호키가 달려 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 바깥에 갇히다> 정용화

 

이렇게 보면 ‘보다’는 개념도 그냥 눈으로 보는 개념이 아니라, 보이는 것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끌어 들여다본 것이고, 그렇게 본 것 중에서도 나의 가슴에 어떤 느낌으로 닿은 것이 진정으로 본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생각은 이런 선험이 언어화 되어 내 안에 저장된 언어가 어떤 상황, 계기를 통해 출력되는 현상이다. 상상력 또한 내 안에 있는 언어 간의 통섭이다.

위 시에서도 우리는 늘 ‘갇히다’는 개념은 ‘안쪽’과의 연결어지만 ‘바깥에 갇히다’란 의미로 새롭게 해석해 낸 경위도 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어린왕자’를 10년 주기로 읽어왔다.

읽을 때 마다 이해되는 내용의 폭과 깊이가 다르게 닿아왔기 때문이다,

경험이나 생각이 부족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도 보이고, 새로운 관점에서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세상은 내가 살아온 삶만큼만 읽혔고, 내 삶의 그릇만큼만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만난 언어만큼 세상은 어제와 다르게 열린다는 것을 알았다.

사는 즐거움이자 하루하루를 새롭게 사는 길임을 알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는 시인의 경험의 맥락에서 마련된 개념어를 통해 재발견된 의미다,

나는 마경덕 시인의 <꽃등심>이란 시를 읽은 후에는 한동안 쇠고기를 먹지 못했다. ‘되새김질로 등에 꽃을 심고 쓰러진 소, 죽어야 피는 꽃’이란 존재론적 사유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적 연출은 재발견을 위한 연출이다,

생각난 김에 마경덕의 또 다른 시 한편을 소개한다.

 

마당에 깔린 어둠이 한 자루다

마루밑에 웅크린 어둠은 몇 가마니의 무게로 늙었다

먼지 낀 시간위에 됫박으로 씨를 뿌린 잡초들

이곳에서 적막은 거름으로 쓰인다

뒷목이 서늘한 추녀 끝

그늘에 묶인 씨종자들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고
단단한 고요의 매듭에 피가 마른다
겨울의 발톱이 빠지고 뒤곁에 잔풀이 돋아도

사람의 흔적은 폐허로 남았다

눈이 침침한 대추나무

절구통 밑으로 굴러간 묵은 대추 몇 알 더듬는 봄날
장대를 휘두르며 빈집을 다녀간

바람의 성대만 늙지 않았다 -<빈집> 마경덕

마경덕 시인의 개념어를 들여다볼 때마다 시창작의 교과서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경덕 시인의 빈집은 여느 시인의 <빈집>에서 볼 수 없었던 낯익고도 낯선 풍경을 만날 수 있고,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서 먼 시골의 빈집이 한 폭의 수채화로 안겨오고, 그리움이 눈 가득 안겨온다.

마경덕 시인의 개념어로써의 <빈집>이기 때문이다.

‘마당에 깔린 한 자루의 그늘, 몇 가마니의 무게로 늙은 어둠, 먼지 낀 시간위에 됫박으로 씨를 뿌린 잡초들, 적막의 거름, 뒷목이 서늘한 추녀 끝, 그늘에 묶여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은 씨종자, 단단한 고요의 매듭, 빈집을 다녀간 성대가 늙지 않은 바람’등이 마경덕 시인의 <사물의 입>을 만나는 즐거운 공감화법이다.

시를 읽는 행복일 것이다.

 

그녀,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잠시 생각의 한 폭을 비웠을 뿐

눈길 그대로다

잠시 틈을 내어 주고받았을 눈빛 따라 안방에 들어온 사내의 멋쩍은 웃음을 미소로 받았으리, 뜨거운 호흡으로 열었으리. 아침이든 한낮이든 그 틈새를 비집어 나눈 대화가 겨울 온기를 더했으리. 천년의 달빛아래 그녀의 숨소리 더 내밀했으리

오래 오래 고요한 신라의 어둠과 별자리까지 기억하는

그녀의 미소,

엉덩이 펑퍼짐한 세월,

그 때의 숨소리가 그 때의 고백이 부식되지 않은 달빛으로 맑게 피었으리

-<월하정인月下情人(신라인면와당)> 신병은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과 ‘신라인면와당’을 상호 유추한 시다, 혜원의 <월하정인>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고, 그림의 구성이 갖는 메타포를 만나고, 月沈沈夜三更, 兩人心思兩人知(달빛 침침한 야심한 삼경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안다)는 화제畫題의 의미를 살피는 즐거움을 통해 신라인면와당에 그려진 여인의 이야기를 상상해본 시다.

창의성은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능력이라 정의되지만 시창작의 창의성의 개념은 이미 경험한 내용을 통해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위대한 상상력은 천재성이 아니라, 입고출신入古出新이고 온고시진溫故知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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