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험이 나의 언어다
나의 경험이 나의 언어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23.06.0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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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85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창의성은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능력, 즉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모든 정보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는 능력이다. 이미 내 안에 있는 정보를 적재적소에 불러내는 능력이다.

상상력 또한 마찬가지다.

상상력도 이미 내 안에 있는 정보를 필요할 때 불러내어 연결하고 대입하는 것이다.

내 안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의 총량을 스키마라고 한다,

그래서 상상력은 정보의 데이트베이스에 달려있다.

경험이 곧 언어고 언어가 곧 존재다.

직·간접적인 경험은 곧 언어가 되어 내 안에 저장된다. 그래서 일상에서 시적순간이 오면 그에 필요한 언어가 소환된다. 시적 상상력도 언어와 체험의 만남이다.

경험에 의해 새로운 지식이 창조되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언어가 창조된다.

경험이 많을수록 내가 가진 언어가 많아지고, 내가 소유하는 언어가 많으면 많을수록 말부림의 폭이 넓고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 언어적 체험의 깊이와 너비가 유추, 연상의 수준과 스펙이다.

예를 들면 ‘막걸리’라는 제시어를 만나면 ‘비오는 날, 파전, 주전자, 어릴 때 심부름, 트롯가수 영탁...’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제시어를 보며 떠오르는 모든 어휘는 이전에 내가 경험한 것들이 언어가 되어 내 안에 기억된 것들이다.

또 ‘길 없는 땅인 맹지’가 주제어로 제시되면 ‘고립되다, 끊기다, 닿을 수 없다’ 등의 관련어를 생각하고 나아가 ‘끊긴 마음, 닿을 수 없는 마음’도 맹지의 관련어로 확장되어 ‘사람과 사람도 닿은 수 없으면 맹지’라는 상상으로 이어진다.

또 ‘밑’이 라는 주제어를 보면서 ‘바닥, 근본, 밑이 큰 항아리, 밑이 큰 사람, 그 사람의 밑을 내려가 보다’등의 관련어를 떠 올릴 수 있다.

이런 생각의 출력이 곧 시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유자재로 새롭고 공감있는 말을 불러낼 것인가다. 이는 늘 듣는 말이 아닌 새로우면서 낯설고 감동을 주는 화법을 구사할 것인가의 문제다.

낯선 경험에 의해 낯선 언어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어와 역설에 의거 뒤집어 생각해 본다거나, 역발상을 해본다거나 하여 정상적인 것을 한번 비틀어 보게 되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의미, 단어 안에 숨겨져 있는 다른 어휘를 발견할 수 있다.

익숙한 낯선 단어를 만들어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위 시도 누구나 한번 쯤 경험한 기다림의 이야기다. 약속장소에 먼저 가서 기다려 본 사람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다가오는 발소리로 모든 청신경이 닿아있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다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의 진술에 공감하게 된다.

우리 삶의 일상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도 공감하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경험이 언어가 되어 내 안에 이미 있는 의미를 불러낸 것에 불과하다.

어느 날 자작나무 잎이 바람에 펄럭이는 광경을 보면서 꼭 책장을 한 페이지씩 넘기는 것과 같이 보이는 시적순간일 때 그때는 나무가 책이 된다.

그러면 자작나무와 책은 ‘펼치다’라는 연결어를 통해 독서행위에 기대어 생각을 펼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자작나무’에 대한 시적 상상력은 무한대로 확장이 될 수 있다.

 

자작자작 소리내며 하얀 꽃처럼 바람에 팔랑댄다.

바람의 지문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면 맑고 고운 봄 하늘이 보이고, 밑줄 그은 햇살이 보이고, 새의 죽지처럼 퍼득이는 어둠도 보이고 끝내는 기울어진 생각의 떨림까지 보인다. 끝내는 행간마다 직박구리 까치 산비둘기 울음소리도 들린다.

 

‘자작나무’라는 제시어에 생각의 관점과 확장에 따라 또 다른 많은 의미와 어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익숙한 낯선 단어를 만들어 의미를 심장하게 하는 방법이다.

‘의미심장하다’는 말은 의미가 심장에 꽂히면 의미심장해진다는 뜻이다. 즉 의미를 머리에 닿게 하여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가슴에 닿게 하여 느낌이 닿아 감동하게 한다는 뜻이다.

‘세상을 지배하려면 상대방의 마음을 훔치고 싶다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말고 은유적으로 설득하라‘는 말은 의미를 심장에 꽂아 의미심장하게 하라는 뜻이다. 느낌이 닿도록 하라

모든 시는 시인 자신은 물론 독자에게 의미심장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내용에 안겨있는 낯선 의미를 발견하여 제시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시창작의 낯설게 하기는 ‘일상사 속의 일상사’ ‘일상어 속의 일상어’를 발견하는 일이면서 이것에서 전혀 다른 영역의 저것을 보는 일이다.

시를 시답게 하는 것 또한 시 속에서 경험과 그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일 것이다.

 

누구나 경험한 것에서 누구나 경험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집어 낼 것
순수하게 자신의 경험으로 발견할 것
비일상적인 시각을 동원할 것
현미경적 시각으로 관찰할 것
인습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역발상적인 발견
낯선 대상과 병치함으로써 낯선 인상을 줄 것

 

역발상의 유추 또한 마찬가지다. 일상화된 우리 인식의 틀을 깨고 그렇다고 생각해왔던 인과관계를 차단하여 경험과 경험, 생각과 생각의 몽타쥬 혹은 콜라쥬를 하는 것이다.
역발상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의미를 발견하는 힘이 된다.

즉 가족 때문에 화나는 일이 있다면 그건 그래도 내 편이 되어줄 가족이 있다는 뜻을 헤아리고, 쓸고 닦아도 금방 지저분해지는 방 때문에 짜증나면 그건 내게 쉴 만한 집이 있다는 뜻을 헤아리고, 가스 요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지난겨울을 따뜻하게 살았다는 뜻을 헤아려 내고, 몸이 뻐근하고 피곤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뜻을 헤아리는 일이다
시창작은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의심하고 질문하여 그 속에 있는 다른 의미를 찾는 일이다.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오세영 <원시((遠視)>

 

위 시도 나이 들면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는 원시안遠視眼에 대한 재발견이다.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라는 누구나 겪는 원시를 새로운 의미로 독자의 공감을 얻는다.

포즈가 생각이고, 생각은 경험의 출력이란 정의에 동의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시창작론은 삶의 경험, 그것으로 마련된 생각이 어떤 상황에 따라 소환되는 관계의 인문학이다.

생각은 과거의 경험이 언어화 되어 내 안에 저장된 정보다.

직·간접적인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보가 많고, 내 안에 저장된 정보의 총량(스키마)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각이 깊고도 넓고, 생각이 깊고 넓을수록 언어부림이 수월해지기 마련이다.

상황에 따라 적재적소에 불러내어 활용하는 힘이 언어부림이자 시적전개의 힘이 된다.

 

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 “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 화장실서 청소하고 / 거실에서 티비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 맑은 풍경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 대웅전 꽃살문 스치는 바람소리를 냅니다.

- 공광규 「무량사 한 채」 전문


인문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풀어내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고민하면서 우리 삶을 더 가치있게, 아름답게, 의미있게, 인간답게 풀어내는 화법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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