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다시태어나도 그 손 잡겠습니다”
“詩 다시태어나도 그 손 잡겠습니다”
  • 강성훈
  • 승인 2022.12.27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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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 두 번째 시집 ‘어떤 이유’ 펴낸 박혜연 시인
“단정하면서도 살갑고, 지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시선” 눈길

 

구비쳐 온 길들이

바다와 마주치고

바다는 또다시

수평선 밀어내며 먼 길 떠나고

여수는 보이는 곳마다 계단을 만든다

한 걸음 한 걸음

작은 걸음으로 비탈에 길을 낸다

그 길은 손바닥만 하기도 하고

그 보다 작기도 하다

층층이 작은 계단에

물을 대고 햇살을 들이면

계단은 어느새 작은 둥지가 된다

구비쳐 온 길이 힘든 당신,

작은 계단들이 옹기종기

둥지를 튼 여수로 오시라

지친 날개 잠시 접고

햇살과 바람과 파도가

길을 낸 여수에서

마음 안 계단을 살며시 밟아보시라

그러면 당신과 출항을 준비하며

층층이 푸른 깃발을 단

바다를 볼 수 있으리라

- 「여수麗水」

 

 

등단 30여년을 앞둔 박혜연 시인이 최근 펴낸 두 번째 시집 ‘어떤 이유’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14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며 화제를 모았던 첫 시집 ‘붉은 활주로’ 이후 8년여만이다.

이번 시집에는 여수 곳곳, 장소성에 천착한 시들이 많다.

율촌면 산수리 왕바위재에 있는 고인돌이며, 흥국사에 있는 홍교,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는 만성리 검은모래해변, 모사금해수욕장, 둔병도, 조발도, 적금도,...그리고 여수를 담았다.

시인이, 여수사람들이 즐겨 찾는 여수의 맛도 맛깔스런 혹은 깊은 맛의 시작품으로 퍼 올렸다.

물이 아름다운 도시, 여수를 사랑하는 시인의 지극한 정성으로 건져 올린 시편들은 장소성 너머 삶을 관통하는 언어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풍경의 외연과 내포를 살피며 상상력을 밀고 나가는가 하면 인간역사의 협곡을 더듬어 내면서 삶의 원형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시적 사유로 풀어낸다.

대상과 현상을 자신의 삶의 가치를 대신하는 상관물로 직조하는 언어 감각은 그만의 개성을 낳으며 흡인력 강하게 독자를 사로잡는다.

박혜연 시인은 “작디작은 알맹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단단한 바닥이 될 수 있음을 알겠어/수없이 부서진 나와 결속한 바닥”(「모래의 꿈」)이라거나 “꽃잎 하나 지는 소리에도/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아”(「달빛 아래 목련 식당」) 몸을 기울이는 시인이다.

시인의 몸과 마음이 머문 자리, 그곳에 여수의 근현대사, 임진왜란, 일제의 만행, 여순사건과 펜데믹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사회의 의미망이 소환되는가 하면 때로는 진지하고 고요하게, 때로는 발랄하고 따듯하게 낯익은 일상에서 낯선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시선은 시종 울림이 깊다.

신병은 시인은 해설을 통해 “박혜연 시인은 스스로를 두드리며 자신의 궁극적 질문에 다가가고, 경험을 불러내어 그의 시적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있다”며, “그에게 시는 생각의 쓸모를 넓혀 세상에 없는 생각을 만드는 맑은 창이자 세상에 없는 세계와의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말한다.

또, “그에게 시는 그 자체로 자존이 된다. 진심으로 자신을 만나기 위한 함축적 질문과 함께 실존의 처음을 궁금해 하고, 자신만의 개성적 어법으로 세계의 본질을 하나하나 밝혀낸다”고도 했다.

“작정하고 자신의 어법으로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철학적 메시지도 그렇지만 인문학적 따뜻함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그의 시가 단정하면서도 살갑고, 지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냉철한 분석이면서 따뜻한 시선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시인은 이야기 한다. “詩 / 다시 태어나도 / 그 손 잡겠습니다” 라고

 

박혜연 시인은 송광에서 태어나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시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집 붉은 활주로를 냈다. 2017년 한려문학상, 2018년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했으며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코로나19 예술로기록’ 사업으로 상실의 시대 공저시집을 펴내 대국민감동프로젝트 TOP11에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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