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이 태극기를 사랑하는 날까지 봉사할 것”
“세계인이 태극기를 사랑하는 날까지 봉사할 것”
  • 이상율 기자
  • 승인 2022.10.04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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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 한 평생 태극기 나눔 봉사 실천하는 김유평 대표
30여년 오대양서 체험한 나라사랑...32년간 6만여장 태극기 보급으로
해양소년단 출범시켜 아이들에게 바다 소중함 일깨우기도
김유평 대표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태극기 앞에만 서면, 언제, 어느곳이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이렇게 읊조린다.

국기 없는 가정과 단체에 태극기를 무료로 나누어주는 “나라 사랑 실천 운동”을 하고 있는 한국특경공사(광양시 중동) 대표이사 김유평(81) 씨다.

국기를 위해 태어났고 국기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주변에서 농 삼아 던지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기 기증 행보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숙명이란다.

곱디고운 소록도가 마주 보이는 동네, 고흥 도양읍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 바다가 좋았다. 잔잔한 물결이 거친 파도를 일구고 태풍이 다가오면 높은 파도에 맞부딪혀 산산이 조각나는 거친 광경을 보면서 소년은 푸른 빛 바다를 지배하는 마도로스가 되기를 꿈꿨다.

1956년 여수수산 고등학교(어로과) 입학을 선택했고 3년간의 이수 과정을 거쳐 그 시절, 고교 졸업, 취업의 길인 어선 선원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고향의 작은 포구에는 다녔던 학교의 실습선처럼 큰 기선은 없었다. 자그마한 어선이 전부였다. 큰 배를 타고 싶었다. 벌이가 제법 좋다는 기선 저인망 어선에 올랐다. 열심히 일했다. 약 3년간 승선으로 지쳐갈 즈음, 더 큰 함정을 타고 싶다는 유혹을 견딜 수 없었다.

그 길을 찾아 해군에 자진 입대했고 병역을 마치자 국제 항로를 오가는 상선에 올랐다. 큰 배를 타고 싶다는 자신의 염원을 달성한 것 같았다. 바다는 넓었다.

가까이는 동남아, 멀리는 스페인 브라질을 방문하고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을 누비면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넓은 세상을 보았다. 어쩌다 가까운 항구에 입항이라도 하는 날에는 열렬히 환영하는 손짓에서 국기의 위상을 느꼈다. 게양대에 달려 펄럭이는 태극 문양의 우리 국기가 그렇게 아름답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애국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럽게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국기의 존엄성을 가슴에 담았다.

선상 생활은 더욱 익숙해졌고 이어 원양 어선에도 도전했다.

망망대해에서 만선이라도 하는 날이면 외화벌이로 나라를 살찌우게 했다는 자부심에 들뜨기도 했다. 이 경험은 1974년 경정 특채로 해양경찰에 몸담게 된다. 배움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던 그는 해군 대학교를 수료했다. 해양경찰 교육대 부대장을 거쳐 본부 경비과장, 제주, 여수, 목포, 부산지구 해양경찰 대장을 끝으로 12년간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어느덧 그간의 경력이 국가, 태극기, 애국이라는 좌표를 가슴에 담도록 했다.

1989년 기업가로 변신, ㈜에이치알포트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10여 년의 공직을 벗고 첫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국기는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 태극기다, 국가의 소중함을 경험했던 그는 국기를 채 갖추지도 못하는 가정이 많은 것을 알고 태극기 보급 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태극기가 없는 가정, 태극기가 훼손된 가정을 1순위로 정했다. 꼭 필요한 행사나 마을, 기관, 단체는 후 순위였다.

경기도 평택, 모 신축 아파트에서 400여 입주 세대에 공급할 태극기 보급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등 나름의 원칙을 고수했다.

제주 추자도 300매, 광양 택시 50매, 광복회 300매, 인천 백령도 600매, 흑산 가거도 50매, 여수 한려동 300매, 묘도 300매 등 무상 보급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1989년부터 나누어준 태극기는 32년 동안 약 6만 매에 이른다. 가정에서 쓰는 일반 표준규격 60x90㎝ 크기로 6만 매는 시중 가격 5000원~7000원으로 환산하면 약 3억 ~ 4억 정도가 된다.

태극기 나눔에서 잊지 못할 특별한 사례도 있다.

묘도는 여수 산단과 광양항의 중간에 자리한 작은 섬이다. 광양항만 쪽으로 온동과 제독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밤에도 국기를 내리지 않아 하루 종일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태극기 마을로 유명해졌다. 세계 각국에서 오는 유조선과 상선이 드나드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마을 앞을 지나는 외국 선원들에게 태극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여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서란다. 이곳을 드나드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2007년 4월 파리의 BIE 실사단이 여수를 방문했다. 2012 여수세계박람회 개최지로 적합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여수는 이를 위해 손님맞이 채비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일행이 지나는 도로변 아파트에 국기가 없는 가구를 조사, 400여 매의 국기를 긴급하게 보내 환영의 태극기가 펄럭이는 장관을 연출해 이들을 맞게 했다.

“요즘 태극기가 사라지고 있어요. 그래도 빌딩에는 국기 게양대라도 만들고 있지만. 주택이나 아파트에 국기를 게양할 자리가 아예 없어요. 건물을 지을 때 국기 봉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관련 법규를 손질해야 해요”

국경일 날 국기를 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관에서 마을 방송을 통해서 권장하기도 하지만 자진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국기 그리는 방법을 가르치고 국기의 존엄성을 알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태극기를 달도록 권장하는 지자체의 정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국경일이 되면 도시의 아파트는 물론 산간벽지 가가호호에도 태극기가 휘날리는 일상이 되는 그날까지 국기 무상 보급 행진은 멈추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그는 태극기 무상 보급에 만족하지 않았다. 바다 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살려 해양 대국으로 가는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도 나섰다.

 

2000년 2월 한국 해양소년단 전남동부연맹을 출범시키고 연맹장에 취임했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헤쳐나갔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해양오염 방지, 해양탐사, 해양 기능인력 양성, 이웃사랑 운동, 해양 축제 행사 등을 꾸준하게 추진했다.

해양탐사 활동 25회(8,274명) 해양기능 훈련 39회(6,899명) 호국 수련 훈련 10회(1,740명) 해양스포츠학교 19회(8,124명) 국제 교류사업 4회(398명) 해양 사상 고취 행사 196회(1,244,078명) 사회봉사 활동, 2012 여수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한 홍보, 국토 순례, 서명 활동 등 괄목할만한 사회적 공헌을 쌓았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이 만일 바다를 조금이라도 이해했으면 희생을 줄였을 것이라면서 어부에게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해양소년단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바다가 무한한 정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착각, 모든 것을 바다에 버리고 있다고 말한다. 바다를 살리는 것이 곧 지구를 살리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는 여수시장, 여천시장, 광양시장 전남도지사 감사장, 표창장을 비롯하여 77년 해양경찰대장 표창, 85년 내무부 장관 표창, 83년 대통령 표창, 85년 대통령 훈장, 여수 시민상, 전남인 상 등 46차례나 상을 받았다.

갯가에서 태어나 바다로 나가고 항구에서 평생을 보냈다. 세계 지도를 거꾸로 돌리면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 세계인이 모두 흰 바탕에 검정 사괘, 청, 홍의 아름다움이 새겨진 태극기를 사랑하는 날까지 봉사하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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