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상황과 시적 상상력
시적 상황과 시적 상상력
  • 남해안신문
  • 승인 2021.02.0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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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62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시 창작을 처음 공부할 때 갖는 공통된 의문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써야 시가 되는지, 어떻게 쓰는 것이 시적 표현인지, 그리고 내가 지금 쓰는 것이 시가 맞는지”하는 의문이다.

그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말을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보면, 그냥 일상적인 대화로 편하면서 평범한 어투로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듯 말하는 사람이다.

말로써 그 대상, 그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대상, 그 상황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해야 한다. 즉 독자에게 뭘 말하고 있는지 분명해야한다.

흔히 우리는 ‘시적 상황’이란 말을 많이 쓴다. 그럼 시적상황은 어떤 상황일까?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전문

 

시인 김수영은 바람에 풀이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서 다른 큰 나무와는 달리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꺾이거나 뽑히지 않는 풀의 건강한 생명력을 발견하였고, 또 그것을 통해 나약하면서도 강한 민중의 건강한 생명을 읽었다.

어떤 대상을 통해 삶의 어떤 상황을 읽어내는 순간이 바로 시적 순간이고 시적 상황이 된다.

우리가 늘 살아가면서 ‘저것이 꼭 뭐 같다’ 혹은 ‘저 모습이 삶의 어떤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 생각을 하는 그 순간이 바로 시적상황이 된다.

김수영시인이 바라본 ‘풀과 바람’의 상관관계가 시적 상황이고 그 상황이 바로 시가 된다.

시적상황이 시적 상상력으로 무한대로 확장된다.

예를 들면 ‘맹지盲地’는 ‘길 없는 땅’이다.

길 없는 땅 ..... 마음이 끊긴 마음 ........ 길도 마음도 닿을 수 없으면 맹지다 .......닿을 수 없으면 맹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닿지 않으면 맹지다.......요즘 코로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서로에게 맹지다 ......이럴 때일수록 몸은 닿을 수 없어도 마음과 마음은 더 가까이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확장된 상상력이 시가 된다.

상상력의 확장은 ‘낯익다’와 ‘낯설다’의 이중구조에서 출발하고, ‘낯익다’와 ‘낯설다’ 그 사이가 시적 긴장이다. 그 사이가 멀면 멀수록 긴장력도 높아진다.

위에서 ‘길 없는 땅’이라는 뜻의 ‘맹지’는 ‘낯익은 의미’이고, 거기에서 확장된 ‘마음과 마음이 닿지 않은’의 뜻인 ‘맹지’는 ‘낯선 의미’다. 즉 땅의 맹지에서 사람의 맹지로 확장된다.

시적상황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일상 속에서 늘 만나는 사소한 일들이다.

늘 강조했듯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현상과 대상이 곧 시적 상황이다.

수사법은 그 상황에 가장 알맞은 말을 찾는 일이면서 즈 중에서 ‘낯설다와 낯익다’의 거리가 먼 말을 찾아 의미를 확장하는 일이다.

즉 김수영인의 풀처럼, 복효근시인의 지주목처럼 시인 자신의 고유명사를 마련하는 일이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 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을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 복효근 <버팀목에 대하여> 전문

 

복효근 시인은 나무를 심어놓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지주목을 받쳐놓은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오면서 늘 보아왔던 풍경이다. 그런데 복시인은 문득 그 모습에서 ‘기대어 사는 삶’을 떠 올렸다. 이순간이 바라 시적상황이다.

시적상황이 인지되는 순간부터 시적 상상력은 확장된다.

살아있는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있다 ..... 그러고 가만 생각해보면 기대지 않은 삶이 없다.... 나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의 기대어 있고 ...... 돌아가신 스승님의 가르침에 기대어 있고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 기대어 있고 .....

시적 상상력을 펴는 방법은 이렇게 관련되는 다른 풍경을 끌어다 나열한 후 그 중 하나의 의미를 중심에 두고 써게 된다. 이런 상상력의 확장이 한편의 시가 된다.

‘밑’ 혹은 ‘바닥’의 상상력을 보면

밑, 근본, 아랫도리, 바닥......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리...... 밑이 큰 나무, 밑이 큰 그릇, 밑이 큰 여자, 그 사람의 탄탄한 밑동. 그 사람의 밑을 내려가 보면, 밑을 잘 다지고 가꾸는 사람들 ...... 밑이 넓은 말, 밑이 넓은 행동, 밑이 넓은 일 .....

문의 상상력을 보면

사랍문, 미닫이 문, 파란 문, 추억의 문, 사랑의 문, 지식의 문, 미래로 가는 문, 물의 문, 기억의 문, .....그러며 물의 문 혹은 기억의 문에 자물통도 달아보고, 발로 한번 뻥 차보고, 노란 페인트도 칠해보고 ......상상속에서 새롭게 창조하는 문, 상상의 문을 여는 방법은 무한정이다.

이런 상상력을 펴다보면 우리가 늘 알고 있던 ‘밑’ ‘문’만 아니라 수많은 ‘밑과 문’을 만날 수 있고, 수 많은 시적상황의 ‘밑’과 ‘문’을 창조할 수 있다.

살다보면 문득 문득 어떤 상황에서 그동안 알고 있었던 그 나무가 아니고, 그 꽃이 아니고, 그 바람이 아닌 것이다. 시적 상황에서 다시 보여진 나무, 풀, 꽃, 바람이 되고 여기서 시적 상상력이 확장되고, 다음과 같은 시적표현도 가능해진다.

 

정원이 자란다

나는 내 가슴에 숨어 훔쳐보곤 했다

너 떠난 발자국 소리 문득 문득 아프다

사내 하나가 내 처마 밑에 서있다

바람의 지문으로 바다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긴다

거기 팔랑대는 하늘이 보이고, 행간마다 새소리가 잠들어 있다

마음의 능선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면

뒷산 능선이 그 뒤의 능선으로 어둑어둑 저미어 안겼다

개화 속에 낙화의 표정이 담겨있다

 

그러면 시인에게 시적인 순간이 언제 오는가

아주 사소하고 낯익은 일상에서 낯익은 삶의 이야기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것을 다르게 상상하는 일에서 가능한 일이다.

낯설면서도 낯익고, 낯익으면서 낯선 이야기는 전혀 다른 대상과 상황이 만나서 새로운 의미로 재생산 되는 것이다. 둘 다 낯익은 이야기면서 서로에게는 낯선 이야기지만 만남을 통해 낯익음과 낯섬의 사이를 메워준다.

그래서 시적 인식은 내 이야기이면서도 너의 이야기여야 한다.

좀 다른 방식, 친절하지는 않은 시. 친절하지 않기 때문에 더 친절한 시를 위한 장치가 된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사소한 것들에서 발견해내는 힘이 창작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내가 죽었다는데, 매미가 제일 오래 울었다

귀신도 못되고, 그냥 허깨비로

구름장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니

매미만 쉬지 않고 울었다

대체 누굴까

내가 죽었다는데 매미 홀로 울었다

저도 따라 죽는다고 울었다 - 윤재림 <매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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