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1-12-08 17:13 (수)
공자의 언어와 시 창작
공자의 언어와 시 창작
  • 남해안신문
  • 승인 2020.09.04 1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58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공자(B.C.551-479)는 예수, 석가, 마호메트와 함께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분이다.

2500년을 앞선 통섭의 인물인 공자는 시대를 넘나드는 진정한 스승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문제를 제시해도 막힘이 없이 대답하는 즉문즉설의 대가였다는 것은 그만큼 어느 분야에도 융통성과 창조성을 발휘하는 관계학의 대가였기에 설령 같은 질문을 던져도 그때마다 대답은 달랐다.

그 이유는 진리는 변하는 것이라는 것, 시간과 공간과 문제가 놓여있는 상황에 따라 풀이되는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창조는 시간과 공간, 경계를 뛰어 넘어 자유롭게 넘나들고 소통하면서 그동안 보지못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라면 공자의 즉문즉설은 창조와 다르지 않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일상에서 겪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깨달은 바를 실천한 결과물이다. 뿐만 아니라 논어가 탄생한 지 약 2500여 년이 흘렀음에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논어가 사람의 근본 도리와 인생의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현실을 벗어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한 도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삶의 근본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세상살이의 참지혜를 논한다.

사람의 길을 밝혀주는 학문인 논어는 인간됨에서 시작하여 인간됨으로 끝을 맺는다.

오늘날에 와서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등 유교의 폐해를 비판하며 논란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공자사상은 끊임없이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는 살아있는 고전이다.

 

공자의 사상의 키워드는 ‘배움과 인간됨’이다.

이것은 우리 삶의 전부다.

그래서 논어의 처음은 ‘시간을 내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로 시작하고, 그 마지막은 ‘명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禮를 알지 못하면 세상에 당당히 나설 수 없고, 말言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부지명(不知命)이면 무이위군자야(無以爲君子也)요 부지례(不知禮)면 무이입야(無以立也)요 부지언(不知言)이면 무이지인야(無以知人也)니라)하여 배움과 인간됨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처럼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와 근거가 ‘배움(學)’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논어의 시작도 끝도 배움과 인간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그의 종교와 정치가 되고, 구도의 길이 되었다.

학문과 배움, 공부와 같은 좀 더 보편적인 인간 문명의 길을 제시했고, 인간 모두가 함께 기댈 수 있는 보편적인 삶의 길을 제시했다. 공자의 인(仁) 역시 배움(學)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많이 사색한 사람일수록 첫째,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청빈을 좋아하게 되고, 둘째,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두 번 범하지 않으며, 셋째, 항상 마음에 기쁨(樂)이 스며 있어서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 존재의 즐거움이 변치 않는다고 한다.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조차 ‘no’라고 자기부정을 할 수 있는 내적 힘(극기복례)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기주장을 펼수 있는 근거는 깊고 넓은 배움에서 가능하다. 그걸 우리는 신념 혹은 자기철학이라고도 한다.

논어 술이편을 보면 ‘子曰 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 二三子者 是丘也’라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제자들이 뭔가를 시원하게 알려주지 않은 것 같다는 의심을 받게 되자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공자는 “너희들은 내가 뭘 숨긴다 하는가? 나는 너희에게 숨김이 없노라. 내가 행하는데 그대들과 더불어 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이것이 나丘이니라.”

여기에서 ‘是丘也’는 ‘이게 바로 나다. 너희들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사람이 바로 나다’란 뜻으로 그만큼 매사에 소신있고 신념있는 자기를 내 보이곤 했다.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의 지금 내 모습이 바로 나다’라는 이 한마디에 ‘슬기로운 창작의 기술’이 고스란히 안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그것을 인(仁), 인간다움이라고 하였다.

예수 복음의 핵심 관건인 ‘십자가의 도’가 그것이고, 불교의 ‘공(空)’의 가르침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공자의 사상은 세상의 모든 사상과 소통하는 통섭이면서 관계학의 미학으로 집결된다.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동떨어져 있던 것들을 서로 가까이 세우는 것으로 소통을 하게 하고 그것을 또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자 한다.

배우지 못하면 보고 듣고 느낄 수 없고 결국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삶도 그렇지만 배움 즉, 보는 법, 듣는법, 느끼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되고 그것으로 몇 줄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 창작이다.

이것이 훼손된 인간, 인문정신을 회복하는 길이다.

 

인(仁)은 사람인(人)과 두이(二)가 합쳐져 만들어진 한자어로 ‘두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 두 사람은 ‘나’와 ‘남’, 한자로는 각각 ‘기(己)’와 ‘인(人)’에 해당한다.

공자가 이야기하는 인(仁)이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 다시 말해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남’의 개념을 확장하면 ‘남’은 친구(붕)를 뜻하기도, 가족을 뜻하기도, 나아가 국가와 세계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공자는 이렇듯 점진적으로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일컬어 인(仁)이라했다.

상술하면, ‘나’를 사랑하고, 그 다음으로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고, 나아가 ‘나라’를 사랑하는 점진적 사랑이 바로 인의 실현 과정이다.

그 첫 단계로 공자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최우선 선행 과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자가 제안한 것이 학學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자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라 했다.

 

學 – 孝 – 忠 - 仁

나를 사랑한 다음에는 가족을 사랑하는 孝라 했다. 그리고 나라를 향한 사랑이라 했다.

공자는 정치는 지식인의 책무라 강조하면서 제자들에게 현실정치에 참여하기를 독려했다.

학습을 통해 ‘나’를 채우고, 다음으로 가족을 효로 대하면서 정치가가 되기 위한 그릇을 만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까지 가기 위해서 필요한 정신 중 하나가 바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다. 살신성인이란 ‘자기를 죽여서 인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공자는 효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父母는 唯其疾之憂시니라."라고 했다.

효는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부모가 오직 자식이 병들까 근심하시는 것이라 했다.

효는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말이 맞은 것 같다. 이 말의 의미가 바로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함이 효지시야’)라는 뜻과 상통한다.

모든 것이 인간됨이고, 인간됨은 배움에서 비롯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공자의 중심 사상은 호학好學정신이다.

‘知之爲知之不知爲不知 지지지위지 부지위부지(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라)

배움에 임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紙經不如天經’ 종이경전이 하늘의 경전만 못하다. 세상이 다 공부다. 가르침이다. 그래서 나무와 풀, 새와 꽃, 닭, 강아지, 바람에게서 평생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다.공자는 평생 배우기를 좋아했다.

세상에 나보다 똑똑한 사람은 분명이 많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말한다.

호학사상好學精神에서 춘추제가의 모든 사상이 나왔고 대학이라는 위대한 경전이 만들어졌다.

창작의 중요한 가치요소가 질(質)과 문(文)으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이다.

공자는 질(質)과 문(文)은 내용인 ‘본질’과 형식인 ‘표현’을 뜻한다며 두 요소를 똑같이 소홀하지 않았지만,

공자는 내용인 ‘질’을 더 중요시했고 다음으로 표현인 ‘문’을 강조했다.

내용만큼 형식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朝聞道 夕死可矣’(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라는 공자의 도를 좋아한다.

공자가 사유한 도란 듣는 순간 완성되는 ‘명제적 지식’이 아니라, 하루 반나절 동안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이루는 ‘실천적 앎’이다. 이렇게 본다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영원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학습하고, 효도하고, 정치에 나서는 삶의 모든 과정도 도에 이르는 순간임을 알 수 있다.

창작도 이와 같은 깊이와 넓이로 임해야 한다고 믿는다.

 

옛것을 통해 새 것을 안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한다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라.

인간이 있어야 한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다.

부와 권세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

꾸밈과 바탕이 어우러져야 군자라 할 수 있다.

인을 행함에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형제다

세 번 생각한 후에 행동한다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

하늘에 죄를 지은 사람은 빌 곳이 없다

대군의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어도 한 사람의 뜻을 꺾을 수 없다

나는 감히 공자의 언어를 시창작의 밑거름으로 둔다.

좀 고답적일 수 있겠다는 염려도 있지만 세계와 폭넓게 소통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