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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에서 본 ‘소요유’와 권력이 나아갈 ‘길’
진달래꽃에서 본 ‘소요유’와 권력이 나아갈 ‘길’
  • 임현철 시민기자
  • 승인 2019.04.11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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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일지 1] 여수 영취산 진달래축제장과 우리네 삶

발가벗은 나와 마주합니다. 전에는 가식에 쌓여 감히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떠올립니다. 이런 변화가 고맙고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시민운동가를 접은 후 프리랜서란 직업으로 두 아이를 오롯이 키우기가 버거웠습니다. 삶이 고행(苦行)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주한 현실은 ‘경비’였습니다. 경비 생활 40개월여 기간은 수행 생활이었습니다.

변화가 많았습니다. 이에 대기업 협력업체에서 시설 경비를 하며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느꼈던 세상의 합리와 불합리를 풀어내고자 합니다.

그 방식은 이황과 이이가, 공자와 맹자가, 노자와 장자가, 예수와 석가모니가, 소크라테스와 칸트가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전했던 ‘불변의 진리’라는 이름으로 풀어낼 생각입니다. 부디 격려와 성원 부탁드립니다. - 글쓴이 주 -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노자 『도덕경』 첫 구절입니다. 이는 ‘도(道)는 도라 부르는 순간 진리의 도가 아니요, 이름(名)은 이름 붙이는 순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도(道)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게지요.

이를 불교식으로 설명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쯤 될까. 허나, 진달래꽃은 이름 부르는 순간 더욱 더 빛을 발합니다. 어떤 생명이든 존재는 그 자체로 빛나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공(空)이요, 허령지각(虛靈知覺)이며, 신명(神明) 및 진선미(眞善美)입니다.

 

진달래꽃에 놀란 봄, 화들짝 기지개 켜고

 

씩씩한 봄기운에 화들짝 놀란 진달래 활짝 피어납니다. 덩달아 개나리, 벚꽃까지 활짝입니다. 또한 겨우내 움츠렸던 우리네 마음도 피어납니다. 탐(貪)ㆍ진(瞋)ㆍ치(愚, 불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번뇌. 탐욕(貪欲)과 진에(瞋恚) 및 우치(愚癡).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 및 어리석음을 말한다) 때문이었을까. 진달래꽃 미혹에 푹 빠졌습니다.

허나 이런 탐·진·치는 괜찮지 싶습니다. 진달래꽃이 자랑하지 않아도 빛나던 시기, 상암동 영취산 진달래 축제장으로 향했습니다. 어쩐 일일까. 게으른 눈이, 산에 오르기도 전에 먼발치서 먼저 앞장서 오릅니다. 먼 곳에서 보이는 아름드리 분홍빛 진달래꽃 무리, 어서 오라 유혹입니다. 사람 홀리는 설레발 없어도 필시 오를 것을! 헌데 설레발이 밉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넘어가고 난 뒤끝이니까. 사심 버리고 “몰라”하며 자연과 그냥 어울리면 땡이니까.

 

 

영취산

임호상

산에 오르기만 했는데

취하네 영 취하네

꽃보다 꽃 같은 당신에게 취하네

아하 그래서 영취산이네

올라올 때 물든 붉은 사연일랑

그냥 두고 가소

지나는 바람이 당신 수상타는

음주측정, 서운해 마소

다 영취산 그 녀석 때문이라고

투정 한번 부리면 되네

영취산 오르는 길 입구에서 본 임호상 시인의 ‘경고’가 재밌습니다. ‘영취산에 취해 음주측정에 걸리거들랑 서운해 말고 내 탓하라’는 역설적 조언이 무척이나 귀엽습니다. 하지만 음주측정에 당할 산행객들이 아니지요. 다들 그랬다간 큰 일 나는 줄 아니까.

 

사람들은 장자의 ‘소요유’를 은연중 다 알고 있다, 허나!

 

바람이 차갑습니다. 겨울, 마지막까지 버티고 싶은 애타는 몸짓입니다. 어림없지요. 자연의 이치가 어디 호락호락 하던가요. 자연은 늘 때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할 때와 말아야 할 때, 나설 때와 그렇지 않은 때, 있어야 할 곳과 피해야 할 곳 등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자연에 맞게 사는 게 곧 도(道)지요. 걷다 보니 호흡이 가파옵니다. 땀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여기서 쉬었다 가세.”

“벌써 쉬자고. 운동 좀 해.”

“쉬엄쉬엄 걸어. 산에 뭐 숨겨놨어.”

“복잡한 마음 다 내려 놔. 천천히 여유롭고 즐겁게 하는 게 산행이야.”

산에 오를 때면 늘 하는 대화가 언제나처럼 나옵니다. 사람 사는 곳이 매 한가지란 증거지요. 맞습니다. 산에 숨겨놓은 것도 없는데 죽자고 오를 이유 없지요. 『장자』에서 주장하는 ‘소요유(逍遙遊)’라는 거죠.

사람들은 이처럼 산에 오르는 이유를 은연중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천히 여유롭고 즐겁게 하자”는 거죠. 뻔히 알면서도 안 되는 게 우리네 인생사. 그럼에도 되게 하려는 노력 덕분에 삶은 살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산행에 함께한 동료들.

 

고생 끝에 낙(樂)이라고 했던가. 드디어 짊어지고 왔던 가방을 풉니다. 상추, 배추, 고추, 마늘, 돼지 수육, 돼지 족발, 밥, 배추김치, 파김치, 방울토마토, 양념된장 등이 하나씩 나옵니다.

여기에 특별한 게 있었으니, 밴댕이 젓갈. 정성껏 양념해 가져온 정호근 씨에 따르면 “매년 정어리 젓을 담았는데 두 해 전부터 정어리가 비싸 임시방편으로 밴댕이를 택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신의 한 수였으니! 배가 불러오자 세상살이가 터져 나옵니다.

 

“치매 걸린 사람이 집에 있으면 온 집이 비상이야”

“성님. (집 나간) 어머니 찾으셨다면서요, 어찌된 게요?”

“어머니가 치매야. 삼사년 되었어. 오후에 잠시 한 눈 판 사이 사라지셨어. 실종신고부터 하고 천지를 찾았지. 우리 집은 여수 덕충동인데 고맙게 밤 열시 반쯤 소라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더라고. 치매 걸린 사람이 집에 있으면 온 집이 비상이야. 아예 꼼짝을 못해.”

“어머니 연세가?”

“그리 많진 않아. 이제 팔십이야. 눈만 뜨면 밖으로 나가려고 해 그게 탈이야. 약을 드시긴 하는데 어찌 될지 몰라 걱정이지. 아무도 장담 못해.”

치매, 한 가정에서만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주위에 넘쳐납니다.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그들만의 고통입니다. 하여,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신 집은 요양원에 많이들 의지합니다. 예서 한 마디. 지금까지 국가는 이렇게 국민 등골 뺐습니다.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바라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라.”

21세기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어림 반 푼 없는 소립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개인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기 전에, 국가가 주인인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심사숙고 한 후 실천에 나설 때라는 겁니다.

국가권력이 뒷짐만 질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 국민의 고통을 줄여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요순과 세종이 실천했던 ‘주권재민(主權在民)’입니다.

암튼, 국가든, 사회든, 직장이든, 가정이든 모든 권력은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구성원들에게 돌려줄 때 빛나는 법. 이를 알면 대인배요, 간과하면 소인배지요. 그래 설까. 장자는 국민이 등진 권력은 바뀌어야 한다는 “혁명”론을 주문했습니다.

이는 그동안 수없이 당했던 ‘백성’이 자신의 치부를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권력자’들에게 울리는 경종입니다.

 

자연처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꾸며

 

“바람 좀 봐.”

“바람을 보라고?”

“바람이 세게 불잖아.”

“자네 눈엔 바람이 보이나 보네?”

“저기 나무가 흔들리잖아.”

“나무가 흔들릴 뿐. 그게 바람은 아니지 않나?”

“….”

영취산 내려오는 길. 바람이입니다. 눈에 직접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무가 흔들리는 걸 보면 바람 때문이란 걸 알 뿐! 그저 온 몸으로 느끼는 게지요. 이처럼 세상에는 뭔지 아는데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게 많습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처럼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길 바라봅니다.

자연(自然)이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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