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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죽을 고비 넘기고 여수땅을 밟을 수 있었어요”
“3번 죽을 고비 넘기고 여수땅을 밟을 수 있었어요”
  • 강성훈
  • 승인 2018.08.0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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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종이 지도 한 장 들고 태평양을 건넌 조원옥(65)선장
2번의 태풍 맞닥뜨려...안전장비 고장...나홀로 6개월 항해
6개월의 항해 끝에 태평양 횡단에 성공한 조원옥(65) 선장. 긴 항해에 유일한 도구였던 해도를 들고 그간의 항해 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6개월의 항해 끝에 태평양 횡단에 성공한 조원옥(65) 선장. 긴 항해에 유일한 도구였던 해도를 들고 그간의 항해 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망망대해에서 죽을 고비를 3번을 넘기고서야 수십년 꿈꿔 온 대양 항해의 꿈을 이뤘어요”

한눈에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40여년 된 낡은 요트 한척을 이끌고 6개월여 항해 끝에 태평양을 건너온 조원옥(65) 선장은 그렇게 꿈을 이뤘다.

하얀 수염이 얼굴을 뒤덮은 조원옥 선장은 지난 6개월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간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단번에 이룬 대양 항해의 첫 출항 이야기를 꺼냈다.

조 선장이 이처럼 무모한 도전에 나선 것은 지난해 12월 오랜 인터넷 서핑 끝에 “꼭 갖고 싶었던 요트 한 척이 눈에 들어 왔다”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미국을 향했어요”

1994년 처음으로 윈드서핑을 배우기 시작한 조 선장은 당시 전남요트협회를 이끌고 있던 정채호 회장을 만나면서 요트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이후 정 회장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 범선축제와 한중일 황해컵 대회, 독도와 울릉도를 오가는 코리아컵 등에 참여하면서 요트를 만나고 항해법을 배우며 대양 항해의 꿈을 키워 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12월 문득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맨 끝에 LA 옥스나디에 있다는 요트 한척을 찾아냈다.

일반 요트가 메인 돛과 배 앞에 한 개의 돛이 있었지만, 조 선장은 찾은 요트는 앞에도 두 개의 돛이 있었다.

“돛이 두 개가 있는 배는 악천후에도 항해가 가능해서 수년간 꿈꿔왔던 대양항해의 꿈을 이뤄 줄 배였어요”

뛰어난 복원력과 별도의 조타실까지 갖춘 배는 이내 조 선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단한 짐을 꾸려 곧장 미국으로 향했다.

조 선장 눈앞에 놓인 배는 1977년 건조된 엔틱스타일의 배로 40여년 세월을 견뎌온 흔적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곧장 구매결정을 하고 1월 5일 LA 인근 옥스나디시의 샌아일랜드 채널항구를 출발했다.

첫 목표는 하와이였다. 무난한 날씨와 또다른 요트전문가가 함께한 첫 항해는 순조로웠다. 항해 20여일만에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계획대로 도착했다.

본격적인 대양 항해를 앞두고 하와이에서 장비점검 등 모든 출발채비를 마쳤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괌을 목표로 출발한 지 20여마일이나 항해했을까? 대양 항해길의 손과 발이 돼야 할 자동항해장비와 전자해도가 고장을 일으켰다.

회항을 택했다. 두가지 필수장비도 중요했지만, 자세히 살펴본 결과 돛을 연결하는 뱃머리 기둥이 오래돼 썩은 상태를 발견했다.

“천운이었죠. 그대로 항해에 나섰다면 배가 그대로 부숴져 버릴 상황이었죠”

하와이로 회항해 수리 작업에 들어갔다. 한달여가 소요됐다.

요트 안에서 바라 본 거친 태평양. 그나마 작은 파도로 태풍과 맞닥뜨렸을 때는 바깥을 내다볼 수도 없었다.
요트 안에서 바라 본 거친 태평양. 그나마 작은 파도로 태풍과 맞닥뜨렸을 때는 바깥을 내다볼 수도 없었다.

 

3월 17일 다시 출항에 나섰지만, 당초 계획대로 괌으로 가서 일본을 거쳐 여수로 오기까지는 하와이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행선지를 일본 오키나와로 선회했다. 이렇게 출항에 나선지 10여일 또다시 자동항해장비가 작동을 멈췄다. 이미 태평양 한복판으로 나온 터라 회항을 할 수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자해도마져 다운이 돼 버리고 말았다. 미국과 일본의 전기 트랜스 호환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망망대해에서 고스란히 혼자 내던져 졌다. 언제 끝날지 모를 바닷길에 의지할 것이라고는 손에 쥐어진 종이 해도 한 장이었다.

“막막했죠. 망망대해에서 눈과 발이 떨어져 나간 상황이라니...”

“곧장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이순신장군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말이 떠오르더라구요. ‘나에게는 튼튼한 세일이 있고, 물과 식량이 충분하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흘러가면 되겠지”라며 마음을 다잡았어요.

이 때부터는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24시간을 ‘4시간여 키를 잡고, 1시간 휴식, 규칙적인 취침’이라는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하기로 했다.

휴식을 위해 키를 놓은 순간부터는 바람과 해류에 배를 맡기는 표류의 순간이었다.

종이 해도에 매일 일정한 시간에 좌표를 표시해 가면서 70여일 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드디어 5월 23일 일본 찌찌시마 입항에 성공했다.

짧은 휴식과 지인의 도움으로 고장을 일으켰던 자동항해장치와 전자해도 등 기본 장비 수리도 마쳤다.

일주일여 머문 후 출항에 나섰다. 하지만, 3시간여 만에 다시 자동항해장치가 고장났다.

다만, 전자해도는 제대로 작동했다. “그나마 눈이라도 보이니 됐다”는 생각이었다.

찌찌시마를 떠난 지 일주일여 지났을까? 이제 이번 항해의 가장 큰 난관에 봉착했다.

5호 태풍 말릭기와 맞닥뜨렸다. 중심기압 975hPa, 최대풍속 32m/s로 강한 세력의 중형태풍이었다.

태풍 북상 소식에 한국에서 조 선장을 기다리던 가족들과 요트협회 등에는 비상이 걸렸다.

외부와 유일하게 연락할 수 있는 장비를 통해 문자를 보내 일본 해상보안청에 SOS를 요청할 것을 종용했다. SOS를 요청하면 배를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조 선장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잘 해 왔는데 지금 포기할 수 없다. 끝까지 갈란다. 걱정하지 말라”고 문자를 다시 보냈다.

그리고서는 돛을 내려 감아 묶고, 선실 아래로 내려가 몸을 뱃전에 밧줄로 묶어 그대로 누웠다. 3일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 마치 죽은듯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3일동안 배가 뒤집혔다 서기를 수차례. 수일간의 전쟁이 끝난듯 고요함을 몸으로 느끼고서야 바깥으로 나왔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또다시 항해의 연속이었다. 3일만에 6호 태풍 북상 소식이 들려왔다. “그나마 소형태풍이어서 가볍게 건널 수 있었다”

긴 항해의 시간동안 사육신의 한명이었던 성삼문이 읊었던 절명 싯귀에 “저승길은 나그네 머물 집도 없으리니 오늘밤은 뉘 집에 들러 자고간단 말인가”라는 싯귀를 떠올렸다.

태평양 한가운데 표류와 항해를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이 이 싯귀보다 잘 표현한 글이 떠오르질 않았다.

두차례 태풍의 고비를 넘긴 숨가빴던 항해 끝에 미야자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트 선배였던 지인들이 한숨에 달려와 부둥켜 안고 응원했다.

다시 마지막 출항에 나서 일본 내해를 거쳐 시모노세키, 대마도를 지난 6월 23일 소호요트장에 도착했다.

6개월여의 항해 끝에 여수 땅에 받을 밟은 조 선장은 요트를 묶는 말뚝인 폰톤에 입맞춤하며 첫 대양 항해였자 처음 겪어 본 고된 여정을 마쳤다.

여수에 가장 먼저 요트를 묶는 폰톤에 입맞춤했다.

“만감이 교차했죠. 살아서 돌아왔구나. 꿈을 이뤘구나, 땅을 밟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감사했죠”

“무모했지만, 이 일을 하지 않았으면 평생 대양항해의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아쉬움 속에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죠”

6개월여 항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안 수차례 얼굴을 붉히며 지난 시간을 회생한 조 선장은 자신과 생사를 함께한 ‘율리안나’(6개월을 기다리며 맘고생한 아내의 가톨릭 본명으로 배의 이름을 바꿨다)와 함께 한가지 약속을 속삭였다.

“한달에 한번은 율리안나에 어려운 이웃들을 태우고 세일링에 나설 거예요. 6개월여 항해 동안 기록한 항해일지도 들려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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