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 난중일기, 엉터리 해석 ‘곳곳에’
이순신장군 난중일기, 엉터리 해석 ‘곳곳에’
  • 박태환 기자
  • 승인 2017.06.08 1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점검] 다시 보는 난중일기-2
여사연 김병호 이사장 주장 ... 지역별 정밀한 연구 필요
▲ ‘여지도서 순천부 지도'. 오른쪽 확대 사진에 보면 묘도(猫島)라는 한자위에 초두(++)가 없다. 김병호 이사장은이 때문에‘난중일기를 해석한 외지인들이 묘도를 유도(柚島) 오역했다’고 분석했다.

여수는 이순신 장군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다. 전남도가 실시한 이순신 유물조사에서 여수시가 전남 전체에서 13%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이순신 관련 유물이 풍부한 곳이다.

하지만 이순신에 대한 연구를 미비한 실정이다. 본지는 지난호 ‘이순신 유물은 넘치는데 개발은 엉금엉금’에 이어 두 번째로 난중일기에서 보이는 여수지역 명칭 및 공공건물에 대한 오류를 정리한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김병호 이사장은 난중일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각종 오류가 나왔다고 지적했다.

김 이사장은 그 대표적인 예로 유도(柚島)를 거론했다. 유도는 현재 송도라 불리는데 율촌면 율촌산업단지 앞바다에 있는 섬이다.

난중일기 무술 9월 20일자에는 ‘오전 8시 쯤에 유도에 이르니 명나라 육군 유제독이 벌써 병력을 이끌고 왔다’는 부분이 나온다.

김 이사장은 "난중일기를 번역한 다수의 책에서 묘도(猫島)를 유도(柚島)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오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유도(송도)는 수심이 1m로 얕아 만조 시간 이외에는 통행이 불가능해 사령부가 위치할 수 없다”며 “해군사관학교에서 작성한 ‘순천 왜교 전투도’에도 ‘조명 연합군 사령부’를 유도로 지정한 전투도는 수정돼야 하며 사령부는 지금의 묘도에 위치해야 옳다”고 지적했다.

또, 난중일기에 표시된 백서량(白嶼梁)의 위치도 수정했다. 난중일기 무술 11월 초9일자에는 ‘도독과 더불어 일제히 군사를 움직여서 백서량에 이르러 진을 쳤다’는 부분이 나온다.

김 이사장은 "백서량은 남면 횡간도가 아니고 상암동 신덕 앞바다에 있는 백도를 말한다"며 "이 장군이 순천 왜성에 있는 적을 두고 전장(戰場)을 이탈해 멀리 떨어져 있는 남면에 진을 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꼬집었다.

실제 백서량이 나오는 난중일기 무술 11월 9일자 하루 전인 8일자에는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어 하루 종일 술을 마시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잠시 후 도독이 보자고 하므로 나갔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 왜교의 적들이 10일쯤에 도망해 철수한다는 전갈이 육지로부터 통지되어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그 다음날인 10일에는 ‘좌수영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시간상 남면에 이 곳까지 당시의 배로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는 것.

백야곶에 대한 문제도 지적했다. 난중일기 임진 2월 19일자 기록에는 ‘순시하기 위하여 출발 백야곶의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이 그의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도 왔다. 비온 뒤라 산에 꽃이 만발하여 그 좋은 경치를 말로 포현하기 어려웠다. 날이 저물어서야 이목구미로 와서 배를 탔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 이사장은 “난중일기의 모든 번역본이 백야곶을 백야도로 해석하고 있지만 백야곶은 여수시 화양면 일대 화양반도를 이르며 2010년 국립해양조사원의 자료에도 고돌산반도로 표기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해운대라는 명칭도 등장한다. 해운대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부분은 난중일기 임진 2월 12일자로 “식사 후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후 해운대로 자리를 옮겨 활을 쏘았다. 침렵치 놀이를 구경하였는데 매우 조용하였다. 군관들도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은 시를 읊었다.”고 되어 있다.

김 이사장은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쏜 해운대는 1935년 오동도 방파제 공사를 하면서 파괴됐다”고 말했다.

임진 2월 9일자 기록에는 두산도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김 이사장은 “돌산도로 무슬목을 기준으로 북쪽의 쇠머리(우두리)와 남쪽의 돌산도를 합해 두산도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역이 생긴 이유로 "누락과 오류가 많은 <충무공전서>를 그대로 번역하거나 앞서 번역한 사람들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여수 지리를 잘 모르는 외지인들이 난중일기를 해석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라고 소개했다.

덧붙여, "난중일기는 1953년 설 의식의 <난중일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20여 권 이상이 발행됐는데 번역에 아쉬움이 많다"고 언급했다.

이어 “‘난중일기’는 자구의 정확한 해석도 필요하겠지마는 지역별로 보다 정밀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분위가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