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미국은 여수를 주목했다
1945년 미국은 여수를 주목했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17.02.1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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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주철희 역사학자
▲ 지도-1

미국 CIA보고서에는 1945년 4월 미국 육해군 합동 정보연구원에서 KOREA(당시 일제 지배를 받고 있던 시점)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과 KOREA를 남쪽, 서쪽, 북서쪽, 북쪽으로 나누어 그 지역의 주요 도시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미국 육해군 합동 정보연구원에서 보고서를 만든 이유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본토를 공격과 동시에 KOREA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어 진다. 여수를 상세하게 기록한 부분에 미국의 의도는 잘 드러나고 있다.

대마도도 KOREA였다.

미국의 이러한 목적은 이 보고서의 표지에 잘 드러난다. 인도차이나, 태평양의 루손, 마리아나, 하와이, 미드웨이, 대만, 오키나와 등이 표시되어 있고, 일본과 한반도 그리고 중국과 만주, 소련까지 표시하였다. 즉, 미군과 연합군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군이 지배하고 있던 태평양의 섬들과 동남아시아의 나라를 먼저 공격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지도이다.

이 보고서의 표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은 KOREA를 표시하면서 제주도(QUELPART)와 대마도(TSUSHIMA)를 KOREA의 영역으로 표시하였다.<지도-1 참조> 퀠파트(QUELPART)는 미국과 영국이 부른 제주도의 별칭이다. 미국이 대마도를 KOREA의 영역으로 표시했다는 것은 의미 있다.

일본이 줄기차게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 이제부터 우리도 줄기차게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국수주의적인 태도일까?

▲ 지도-2

미국이 파악한 여수는?

미국과 연합군이 일본 공격과 KOREA 공습을 위해 파악한 여수는 어떤 도시였을까?

여수를 파악하는데 가장 핵심은 위의 <지도-2>이다. <지도-2>에는 여수 연안의 수심이 빼곡히 작성되어 있다. 그리고 여수의 주요기관에 대해 상세하게 표기하였다. 여수군청, 여수읍사무소, 여수경찰서, 헌병대, 여수역, 농수산물 검사소, 세관, 수산학교, 우체국, 학교 등의 공공기관과 여수등대, 오일저장소, 시장, 격리병원, 임시숙소, 이순신동상, 탄약고 등등.

여수는 1937년도 기준으로 인구가 31,259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때 인구는 여수군 여수면의 인구로 보인다. 즉, 화양면, 남면, 율촌면 등을 제외한 인구로 짐작된다.

여수를 설명하는 부분을 살펴보면, 여수는 KOREA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부산과 80마일(약 130km) 떨어졌으며, 부산의 보조 또는 대체항구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상업적 또는 산업적 중요성은 거의 없으며, 일본은 여수항을 군사 및 해상(해상물류) 관점에서 개발하였다. 일본의 규슈와 하카타와 9-10시간 정도의 항로를 통해 원자재와 군수품이 왕래하였다. 이 항구는 군대를 위한 역할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미국 CIA보고서>

여수항에서 여수-시모노세키 정기연락선이 취항한 것은 1930년 12월 20일이다. 즉, 광여선(광주-여수) 철도가 개통(1930년 12월 25일)하면서 여수항은 활기를 띠었다. 일본의 광여선 개통과 정기연락선이 취항한 1930년대는 쌀과 면화 등 경제적 수탈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여수를 군사 기지와 군수품을 제작하는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여수에 임시요새사령부 설치(현, 여수중학교)와 해군 202부대(현, 여수시 신월동 한화공장)와 군수품 공장(현 여수시 신월동 한화공장), 신월리선 등이다.

이처럼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이 여수를 중요한 군사기지로 삼았던 것을 미국은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여수지역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더욱 그 가치가 크며, 중요한 역사 자원이라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여수로 접근하는 방법. 즉 교통망에 대해서는 선박항로, 철도노선, 도로 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고 있다.

여수 신항(현, 엑스포 부지)은 함대를 수용할 만큼 충분하다. 철도는 여수-이리(현 익산)까지 단선이며, 순천에서 전라선과 남해안선(경전선)으로 갈라진다. 철도역 주변에는 창고와 대형 페리부두가 세워졌으며, 철도의 종착지이다. 도로는 2차선 도로가 있다. <미국 CIA보고서>

신항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주목할 것은 대형 페리가 접근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 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함대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KOREA를 조사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대변해준 단어로 보인다. 또한, 여수가 미군의 주요 공격대상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수라는 도시의 일반적인 특징도 상세하게 파악했다.

여수는 남서쪽 있는 오래된 정착촌이 있으며, 북동쪽에 있는 항구에 이르기까지 작은 반도의 기슭을 질러 1.5마일(2.5km)로 뻗어 있다. 남쪽은 해안가를 매립하였다. 2-3개의 사설 병원이 있으며, 하수도는 도랑에 버려진다. 구시가지에는 시청, 경찰서 등과 주택 등이 있고, 신시가지에는 철도역과 검사 사무소가 있다. 얼음공장이 있으며 전화 및 전신이 연결되어 있다. 전력은 보성에서 3,100 킬로와트 용량이 공급되어 있다. <미국 CIA보고서>

남서쪽은 지금의 서교동과 중앙동과 관문동 일대를 일컫고 이를 구시가지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북동쪽은 덕충동과 공화동 등의 여수 신항 일대를 지칭하며 신시가지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공공기관에 대해서도 파악을 하고 있으며, 얼음공장이 있다는 것과 전신, 전기 등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여수의 일반적 특징을 파악하면서 촬영한 사진이다.

여수를 파악한 이유는?

미국 CIA보고서에 다른 도시의 일반적 특징과 다르게 여수에만 나타나는 것이 Billeting facilities(임시 숙소 시설)이다. Billeting은 군인의 임시 숙소를 의미한다. 즉, 임시요새사령부를 창설하거나, 신월리 해군 202부대 등을 건설하는 과정의 임시 숙소를 의미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 여수시장이었던 김선규 씨는 <그때에는 그 생각이>란 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제 말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미군 B-29폭격기가 여수항을 자주 공습해 와 삼동골로 소개(疏開)를 가 시골 학교 1개월 만에 감격스런 8.15해방을 맞이했다.

김선규씨의 기록처럼 1945년 6월 말부터 남해안 일대에 미군 B-29 폭격기가 자주 출몰하였다. 그 미군 B-29 폭격기 출몰에는 여수지역에 분포한 각각의 일제 군사시설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여수는 일제강점기에 경제적 수탈 기지로 활용되었으며, 태양전쟁시기에는 군사기지 역할을 하면서 미군의 공습 대상이 되었다.

‘전쟁’, ‘침략’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되는 슬픈 역사이다. 뼈아픈 역사이다. 그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할 때만이 그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 CIA보고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세상에 나왔을 것이다.

미국 육해군 합동 정보연구원에서 측량한 1945년 4월의 지도를 들고 여수 시내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본다. 여수는 근현대사에서 곡절과 수난의 땅이다. 그 흔적이 곳곳에서 역사로 남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일러두기** 1945년 4월 당시 미국이 우리 땅(한반도, 대한민국, 조선)을 KOREA로 표기하였다. 1945년 당시로 보아 한반도, 대한민국, 조선 등 어떤 명칭이 적절한지 판단되지 않아, 이 글에서는 우리 땅을 칭하는 용어로 KOREA를 그대로 표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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