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침묵의 봄
  • 남해안신문
  • 승인 2016.05.1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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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중일기>이상훈 여수YMCA사무총장

봄 여름 가을 겨울, 열두 달, 365일, 어느 계절 어느 날만이 특별하거나 평이할까만 가장 한국인의 정서와 어울리는 계절이 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정 많고 따스한 성품이 그렇고 느긋한 듯 새로운 것에는 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정이 봄날과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7년째 예비 장인에 속아 머슴살이를 하면서 장가갈 날만을 기다리며 묵묵히 일만 하던 그도 햇볕 따뜻한 봄날에 누르기 힘든 뭔가의 기운에 사단을 일으키고 만다. 장인에게 왜 장가 보내주지 않느냐며 따지고 일어선 것이다. 그의 예비각시 점순이도 겉으로는 아버지 편을 들지만 속으로는 그가 좀 더 야무지게 따져 혼인을 당겨줬으면 하는 마음을 잘도 감추고 산다. 그러다가 봄기운을 거스르지 못하고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고 만다.

김유정의 <봄봄> 이야기다. 이렇듯 봄은 얼었던 겨울을 녹이며 꿈틀댄다. 굳은 땅을 풀어헤치며 새싹을 틔운다. 가지에 새잎을 내어 마침내 초록의 싱그러움으로 땅과 하늘을 채운다.

새싹인 어린이날, 새 생명을 낳은 어버이날, 새 세상을 가르치는 스승의 날이 봄의 한가운데 5월에 들어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봄을 희망과 새 생명의 상징으로 표현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정과 저항과 혁명이다. 언 것을 녹이기 위한 치열한 움직임이다. 가둔 것을 열어젖히고 마침내 속을 뒤집어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봄이다.

인간 역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우리네의 봄 또한 저항과 혁명의 계절이 아닐까. 평소답지 않게 장인에게 장가보내달라고 대든 것도 잠재의식을 깨우는 봄볕의 위력 덕분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36년 전 5월18일, 광주의 그날도 봄볕이 미치도록 찬란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날 무엇이 공수부대의 총칼 앞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게 했을까. 그 무엇이 학생들뿐만 아니라 식당배달원, 회사원, 아주머니, 할아버지 할 것 없이 금남로 도청 앞으로 모이게 했을까.

그 무엇이 장갑차 기관총 대검소총을 몰아내고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었을까. 은행도 구멍가게도 손끝하나 대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가져온 쌀과 김치로 만든 주먹밥을 나눠먹으며 해방구를 지탱하게 했을까.

그것은 지긋지긋한 유신독재와 그것을 부활시키려는 군사독재망령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에 빌붙어 기생하며 민초의 피를 뽑아먹고 사는 독점재벌과 그 비호세력인 관료주의에 대한 오랜 염증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겨울공화국을 거짓 위장하는 언론을 불태우는 화형식이었다.

독재와 악덕자본, 그 주구권력에서 벗어나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아볼 수 있다면 죽어도 좋을 그날 광주사람들이었다. 이 땅의 민초들이었다. 이 시대 대한민국국민들이었다.

18일부터 사흘간의 죽음의 맞섬으로 21일 쟁취한 해방구는 27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열흘간의 불꽃같은 혁명은 다시 총칼로 진압되었고 이후 광주는 산자의 부끄러움과 폭도도시 딱지를 붙인 채 긴 침묵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봄이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총칼로도 침묵의 강요로도 막아낼 수 있는 봄의 생명력이 아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또 다시 돌아온 봄볕에 무장 해제되고 감옥에 갇혔고, 광주는 다시 살아나 얼어붙은 동토를 녹이는 심장이 되고 민주주의의 기관차가 되었다.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한국 민주주의가 성큼성큼 성장하고 풀뿌리지방자치제가 도입되고 인권과 자유가 신장되어갔다. 5월 그날 이후 광주로 상징되는 호남은 한국의 정치적 봄볕이었으며 민주주의의 성지며 시대의 흐름을 정하는 방향타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봄에 치러진 2016 4.13총선 후 이제 광주는 없다, 광주의 역할은 끝났다, 광주는 입을 다물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36년 전의 그 침묵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침묵이 흐르고 있다.

이 침묵의 끝이 어디일지 아직은 모르겠다. 봄의 생명력으로 부활할지, 역사의 불쏘시개로 이대로 사라져갈지... 5월 꽃잎이 여느 해보다 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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