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몫을 충분히 누리라
자신의 몫을 충분히 누리라
  • 남해안신문
  • 승인 2013.01.0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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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지혜> 성서본문: 전도서 5:8-20

서열화 된 지배 권력 아래서
코헬렛은 불의한 권력자들의 횡포가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을 그저 안타까이 지켜보아야 했던 것 같다. 그는 공의를 상실한 재판정과 사회에 만연한 온갖 억압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전 3:16; 4:1).

한데도 국가 안에서 자행되는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 법과 정의의 실종의 주제를 또다시 떠올린다. 이토록 혼탁한 세상 속에서 온전히 제 정신을 갖고 살아가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코헬렛은 불의한 현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경건한 신앙인이었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짓밟히는 것을 그냥 본체만체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홀로 떨쳐나서 무모한 저항을 시도하거나 사회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코헬렛은 혹시 그런 혁명이 성공한다고 해도 근본 현실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최고 권력자인 왕에서부터 가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슬처럼 얽혀 있는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지방의 한 하급 관리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버젓이 패악을 부려도 상급자 중에 아무도 말리는 자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이는 그 관리 혼자 특별히 악해서 그랬다고 보기 힘든 일이 아닌가! 지배권력 구조는 상명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위에서 아래까지 한통속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급 관리에게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해 본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여 코헬렛은 혹 어느 지방에 내려갔다가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과 불의를 보게 되더라도 그런 일에 놀라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는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고 언젠가는 모든 불의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전 3:17).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맘대로 움직여 당장 세상을 심판하시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코헬렛은 냉철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차라리 지배권력 구조를 인정하고 거기에 조화를 꾀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라고 보는 것 같다.

9절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지는 난해 구절이다. 굳이 사역(私譯)하자면 “땅의 이익은 전체를 위해 있고 왕도 밭의 노예이다(섬긴다)” 쯤 된다.

이 문구로 코헬렛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마 세상사가 불평등해도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은 결국 자연에서 얻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이는 12절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왕이나 부자라고 해서 하루 세끼 먹고 배설하며 잠자는 데서 딱히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코헬렛은 오히려 가난한 자가 어떤 면에서 보면 부자보다 더 잠도 달게 자고 건강하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하고 갈망하는 권력과 부의 무상함을 잘 알고 있는 현자였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것이 아무리 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가난한 백성들이 누리는 건강과 삶의 행복마저 앗아가진 못함을 보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땅의 이익은 만인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 누군가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왕일지라도 황금을 먹고 살 수야 없는 법이다. 고로 볼품없는 밭이 내는 소출에 생명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인간이란 아무리 대단한 권력자여도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라는 코헬렛의 냉소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족을 모르는 부의 축적
코헬렛은 교통과 무역의 발달에 힘입어 마치 재물 축적이야말로 지상과제인 양 밤낮없이 수고하는 사람을 여럿 관찰했던 것 같다. 그는 부지런히 돈을 많이 모아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많은 재물을 모았으면서도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부자들은 날만 새면 재물을 더 많이 모으고자 동분서주했다. 많은 부를 축적하고 나면 일생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러는 동안 어느덧 재물이 그들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재물의 노예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코헬렛은 이것을 ‘헛됨(헤벨)’이라고 한다. 돈은 쓰기 위해 모으는 것이다. 한데 코헬렛이 보기에 모을 줄만 알았지 아까워서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자신의 재물이 그저 눈요깃감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전통 지혜에서 재물은 하나님이 지혜로운 자들에게 주시는 큰 선물이었다(잠 3:16; 8:18; 13:22; 24:4).

그런데 코헬렛은 여기서 재물이 지닌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킨다. 부자는 보통 그 재물의 혜택을 입는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게 마련이다. 하여 많이 버는 만큼 씀씀이도 커진다.

이럴진대 재물이 부자 자신의 것처럼 보이나 따지고 보면 꼭 자기 것도 아니다. 부자들 중에는 그렇게 아끼던 재물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고, 무서운 재난을 입는 비참한 일도 종종 벌어졌다. 워낙 혼탁한 시대였으므로 부자들을 노리는 자들도 사방에 많았던 것이다.

코헬렛은 흔히 재물이 행복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나, 대개 부자에게 남는 것은 어둠, 온갖 울분, 고생, 분노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부자들의 삶을 관찰한 코헬렛이 얻은 결론은 재물축적의 헛됨(헤벨)이었다. 그는 재물추구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자들은 아무런 인생의 보람도 없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코헬렛은 괜스레 인생의 냉소와 푸념만 늘어놓지 않는다. 그는 이 어지럽고 모순된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 인간이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지 알려준다.

그가 제시하는 길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다. 곧 수고하고 애써 얻은 몫을 충분히 누리며 ‘오늘을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 오늘을 즐겁게 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당장 어찌할 수도 없으면서도 날마다 온갖 걱정 근심에 시달리며 사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헬렛은 사람이 노동으로 얻은 모든 결실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았다.

그가 보기에 하나님은 각 사람의 분량에 따라 정해진 몫을 베풀어 주고 계셨다. 까닭에 코헬렛은 쏜살처럼 지나가는 인생살이에서 너무 억울해하거나,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필요 없이 자신이 얻은 몫에 자족하며 즐겁게 살라고 한다.

그가 관찰한 부자들은 자신의 재물에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불행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비록 가난해도 자족하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루하루 살맛날 것이다.

코헬렛이 깨달은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복을 충분히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셨다. 그래서 그는 허망한 재물에 지나치게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오늘을 보람 있고 복되게 살라고 계속 설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병진 목사(솔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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