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그립다
이순신이 그립다
  • 고재경 / 비전여수 인재육성 대표
  • 승인 2010.11.0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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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이 과거에 오른 것은 32세로써 보통의 경우보다 무척 늦었다. 그렇게 급제를 하고도 변방의 대단찮은 자리로만 돌아다니다가, 정읍 현감이라는 손바닥만 한 고을살이를 얻은 것이 45세 때의 일이요,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47세 때의 일이다. 실로 15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유성룡이 그의 징비록에 “조정에서는 공을 밀어주고 당겨주는 이가 없어, 급제한지 10여년이 지나도록 출세하지 못했다.”고 했다.

장군은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권문세가에 기대지 않았다. 율곡이 충무공을 만나보자고 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율곡과 충무공은 같은 집안으로 충무공이 아저씨 항렬이요, 율곡은 조카뻘이 된다. 율곡은 일찍부터 출세해서 대신의 자리에 까지 간 사람이요, 충무공은 미관말직에서 허덕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충무공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율곡과 내가 같은 성바지라, 서로 만나는 것도 좋겠지마는, 그가 벼슬을 주는 대신의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만나보지 않겠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기의 서녀로써 공의 소실을 삼겠다고 했을 때, “내가 벼슬길에 처음 나온 자로서, 권세 있는 집안에 발을 붙일 수는 없다.” 하고 거절하였다.
  

장군은 이같이 남의 힘에 의존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게다가 청렴하기까지 했다. 군관 생활을 하는 동안 이순신이 거처하는 방에는 의복과 금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그가 공무 중에 먹어야 할 양식만이 조금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그가 먹을 양식마저 공과 사를 구분하여 처리하는 군관이었다. 이따금 개인적인 용무로 집에 갈 때, 양식이 남은 적이 있었다. 이 양식은 그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으나, 반드시 주무자에게 돌려주었다.

장군은 또한 진실로 부하들과 백성들을 사랑하는 지휘관이었다. 종일토록 싸우고 난 밤에, 부하들을 잠재워 놓고, 자기는 혼자 돌아앉아 등불을 돋우고(獨坐垗燈), 손수 내일 쓸 화살을 다듬었다(自手理箭)고 장군의 행장에 적혀 있다.
  

사랑하는 부하 장수 정운(鄭運)이 전사 했을 때, 그 시체를 안고 애통하며 친히 제문을 짓고 눈물을 거두지 못하던 사람이 장군이었다. 부상한 군인들에게 골고루 약물을 나누어 주고, 죽은 장병들은 그 시신을 낱낱이 보전했다가 고향으로 보내어 후히 장사지내주는 등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지 모른다.   
 

  운주당이란 참모본부를 설치해 놓고 거기서 장병들과 함께 자고 토론할 적에 비록 부하 졸병이나 종놈들의 의견까지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채택했으며, 출장이라도 가게 될 경우 곳곳이 높은 벼슬아치 집에서도 머물 수 있었지마는, 장군은 일부러 종의 집 같은 데를 찾아서 유숙하고 다녔다. 부하와 백성들을 아끼고, 보호하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고, 그들과 같이 먹고 자고 고락을 같이 했던 장군이 충무공이었다.
  

참된 지도자는 국민의 앞을 가는 것이 아니요, 국민의 곁에서 국민과 함께 가는 사람이다. 입만 열면 국리민복이요 지역발전을 외치던 사람들이 부적절한 돈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상황이 한없이 안타깝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천민자본주의라고 한다던가? 돈만 알고 지역민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지도자도 대표도 아니다. 2012엑스포가 50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고장 여수를 찾아올 것이다. 그들 앞에서 우리 모두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천민자본주의의 노예에서 벗어나야한다. 껍데기는 가라. 이순신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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