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나라를 구하다
홀로 나라를 구하다
  • 남해안신문 기자
  • 승인 2009.11.2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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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리더십 지상강좌(3) - 이순신장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고재경 / 비전여수인재육성 대표
이순신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의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건천동은 지금의 인현동 부근이다. 아버지 덕수(德水) 이씨(李氏)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草契) 변씨(卞氏)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벼슬을 하지 않아 서울 생활을 못하고 여덟 살 때에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 백암리(지금의 뱀밭 마을)로 이사할 정도로 가난하였으나 아들들이 모두다 훌륭하게 성장해주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고대 중국의 성인들 이름을 본따서 4형제의 이름을 지었다. 큰 형이 희신(羲臣), 둘째가 요신(堯臣), 셋째가 순신(舜臣), 넷째가 우신(禹臣)이었다.

장군은 뒤늦게 32세(1576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함경도 변방 삼수 고을의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종9품)의 직책을 시작으로 죽기까지 20여 년을 주로 무관생활을 하였으며 억울한 누명으로 두 번(1587년, 1597년)이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쓰라림을 겪었다.

장군의 54년간 삶을 되돌아보면 32년간은 무과시험에 급제하기 위한 수련의 기간이었고 나머지 22년이 공인으로서 생활한 기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임진왜란 7년을 제외하면 하위직 벼슬살이를 전전하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불과 2개월 만에 국토의 대부분이 왜군 수중에 들어갔을 무렵에도 전라 좌수사가 된 장군은 거북선을 만들어 바다를 굳게 지켰으며, 삼도 수군통제사의 중책을 맡아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 및 보급로를 차단하여 일본군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전략 전술을 개발하는 등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하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공직자로서 구국의 일념으로 수범을 보인 부분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개월 전 47세에 좌의정 겸 이조판서였던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어 전쟁에 대비하였으며 전쟁 중에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전승을 거두었다.

또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위국헌신의 충성을 다하여 적을 무찔렀다.

마지막 노량 전투에 임하기 전에는 “이 원수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축원을 올렸으며, 갑옷도 입지 않은 채로 북채를 휘두르며 독전하던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죽음에 이른 순간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애국충절의 마음을 간직하였다.

훗날 선조는 제문에서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안 버렸다.” 하며 애달픈 심정을 토로했고, 정조는 손수 지은 ‘충무공신도비문’에서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의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나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의 비명을 쓴다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 발탁함대를 대패시킨 일본 해군 함대사령관 도고헤이하치로는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이순신에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워서 나라를 구한 분이다.” 라고 극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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