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키우는 재미는 '크는' 재미?
자식 키우는 재미는 '크는' 재미?
  • 임현철 시민기자
  • 승인 2008.02.26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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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화상 14] 졸업
자녀가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건 부모 입장에선 누구나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흔희 ‘졸업’은 ‘삶의 전환기’라고 합니다. 졸업식 때마다 “졸업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자 첫 출발이다”고 말씀하시던 모습들이 생생합니다. 아무튼 자녀는 졸업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학용품과 교복을 구입하고, 학습 준비 등으로 분주하게 됩니다.

졸업은 묵묵히 자녀를 지켜보는 아버지들에게도 관심사입니다. 자녀들이 부딪치게 될 세상에 대한 준비는 잘 하는지? 자세는 어떤지? 등에 대해 표 나게 혹은 표 나지 않게 지켜볼 뿐입니다.

내 경우, 아버지는 졸업식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굳이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세상은 외로운 항해라는 생각이 자리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제 아들 눈치 보게 생겼어”

지인의 차를 타고 가다 졸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 가기 위해 양말을 신는 아들의 발을 보니, 어느 새 내 발과 크기가 비슷하더라고. 다 컸군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하더군. 그리고 고래(?) 잡을 때 아프냐 묻더라고. 부모 자식 간에서, 남자 대 남자로 관계가 확대되는 느낌이 확 들대.”

나의 아버지도 어느 순간, 그랬겠지요. 지인은 그러면서 영상이 한 편이 떠올랐다 합니다.

“아내 눈치 살피다 이제 아들 눈치 보게 생겼어. 일거수일투족이 아이에게 어떻게 비칠까 하는 부담. 자식이 아내보다 더 무서운 셈이지. 아버지로서의 책임감과 자식을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 안정적인 교육 여건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부담감이 밀려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누구든 아버지로서 삶의 무게를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기꺼이 삶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는 자식을 잘 가르치고 싶다는 책임감의 또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루는 아들이 나를 평가(?) 하더군. ‘아버지는 참 신비롭다’고. 밤늦게 들어오니 그럴 수밖에. 스크린 골프에 빠져 밤늦게 들어오는 것도 부담이대. 놀아주는 아버지를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함에 대한 불만이었겠지. 녀석 4학년 때 장기를 가르친 후 수시로 장군 멍군 했더니 아빠랑 그게 하고 싶었나 봐.”

지인의 은근한 자랑 속에는 아버지로서 똑바로 살아야 하는, 귀감이 되어야 하는 부담감이 들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밖에서는 마음껏 행동하더라도 집에서는 옳 곧은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아버지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의 단면일 것입니다.

대견하고 뿌듯한 졸업 VS 걱정스런 졸업

아들 졸업식장에서 지인의 느낌.

“졸업식 날 교실에 들어가 보니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오락을 즐기는 거야. 우린 엄숙한 얼굴과 경건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저 즐거운가 봐. 저것들이 자라긴 자란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물론 문화 차이겠지만. 그래도 아들이 초등학교 졸업하는 게 대견하고 뿌듯하대.”

그러겠지요. 아이 낳아 대소변 받아내고, 우유 먹이고, 우는 아이 어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간다니 얼마나 대견하고 흐뭇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걱정된다 합니다.

“철없던 놈이 자라 중학교에 가서 잘 적응할까, 경쟁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제도권에 들어온 셈인데 잘 이겨낼까, 싶어.”

아버지라면 이런 마음 누구든 대동소이 할 것입니다. 마음껏 놀지 못하고, 적성을 찾아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해야 할 시기라 밤늦도록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자식이 안쓰럽지 않을 아비가 어디 있을까요?

“이제 어른이라고 폼 잡고 싶었나봐”

지인이 한 마디를 더 덧붙입니다. 자식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나 봅니다. 하기야 할 말이 많겠지요. 오랜 세월 키웠는데 안 그렇겠습니까.

“졸업 후, 아들이 전화로 ‘아빠, 나 양복 샀어요.’ 자랑하대. ‘아니 이제 중학교에 들어가는 데 양복은 왠 양복이다냐’ 싶어 집에 와보니 교복을 떠~억 걸어두고 양복 샀다고 자랑한 거여. 양복 입고 어른처럼 재고 싶었던 모양이여. 빨리 크고 싶은 마음이겠지. 나도 이제 어른이라고 폼 잡고 싶었나봐.

그런데 중학교 교복이 양복 같이 보이긴 하데. 우습지? 이게 자식 키우는 재민가 봐. 그놈 엄마가 ‘자식은 늙어서 효도 받는 것이 아니라 키울 때 효도를 다한다’더니 그런 것 같아.”


그가 웃고 있습니다. 웃음의 끝 언저리에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크는 것만으로도 오지나 봅니다. 그렇겠지요. 왜 안그러겠어요. 무척이나 오지겠지요. 귀하디 귀한 보물 숨겨 놓은 것 같은 뿌듯함이겠지요. 이런 게 자식이겠지요.

아이들은 앞으로 무한 경쟁 속에 뛰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힘에 부친 아이는 처지게 되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승승장구하겠지요. 그러다 문득 살아남은 아이도 처진 아이도, ‘아! 세상은 이것만은 아니구나’ 싶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때, 누가 그들을 보살펴 줄까요? 그 때를 대비해 자식을 그렇게 가르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자기도 살고 남도 사는,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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