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과 이순신을 만나다
수군과 이순신을 만나다
  • 오문수 시민기자
  • 승인 2007.11.2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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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상 유적지와 광양만일대를 가다
▲ 하멜등대 - 하멜이 여수에 3년간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여 세웠다.
18일(일요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매영답사회 회원 82명은 충무공 기일을 맞아 광양만권 임진왜란 해상 유적지와 여수국가산업단지, 광양컨테이너 부두 등 산업시설을 둘러봤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지역사 발굴과 연구 ▲여순사건의 재조명과 진상조사 사업 ▲사회 여론조사 ▲국내외 문화 유적답사 ▲지역 현안에 대한 시민정책연구 및 포럼을 수행하는 시민연구 단체다.

▲ 형제묘 - 여순사건 당시 총살 후 불태워진 125명의 민간인들이 한 곳에 매장된 곳이다.
오전 10시 일행이 탄 온바다해운 용훈호가 여수여객선터미널을 출발했다. 국내 유일의 수중성이 있는 장군도를 지나자 곧 바로 하멜등대가 나왔다. 등대 높이는 10m로 해가 지면 광양항과 여수항을 오가는 선박들을 향해 자동으로 불을 밝힌다.

하멜은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제주도 근해에서 풍랑을 만나 서울과 강진을 거쳐 전라좌수영에서 3년동안 생활하다가 13년만에 탈출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하멜표류기를 통해 조선을 서양에 알렸다.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시에서는 이것을 기념하여 무게 140kg, 높이 1.2m 크기의 동상을 여수시에 기증하였다.

▲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김병호씨가 설명하고 있다.
'여수'하면 떠오르는 건 오동도다. 멀리서 보면 섬의 생김새가 흡사 오동잎을 닮았고, 오동나무만 먹는다는 봉황새가 날아들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오동나무가 빽빽했다는 오동도. 그러나 지금 오동도에는 오동나무가 없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말 풍수지리에 밝은 신돈은 기울어 가는 고려 왕조를 대신할 새 임금이 전라도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라도의 ‘전(全)’자가 사람(人)자 밑에 임금(王)자를 쓰고 있는 데다가 전라도의 남녘 여수에 절경 오동도가 있고 그곳에 상서로운 새 봉황이 날아들고 있기 때문으로 보았다.

▲ 광양컨테이너부두 모습 - 임진왜란시 전쟁이 치열했던 현장 부근이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고한 후 전라도의 한자를 고치고 오동도에 봉황이 날아들지 못하도록 오동나무를 모두 베도록 했다. 현재 오동도에는 동백꽃과 함께 신이대가 관광객을 사로잡고 있다.

만성리 남쪽으로 시가지와 연결되는 마래터널은 만성리굴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터널의 북쪽 도로변에는 고분처럼 생긴 형제묘가 있다. 묘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일으켰던 14연대의 군인들이 모두 도망가고난 후, 진압군으로 들어온 군경이 재판도 없이 민간인 125명을 총살하고 불태운 시신을 묻은 곳이다.

▲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사령부가 있어 명나라의 진린 도독이 머룰렀다는 의미의 도독골.
1949년 6월 5일부터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좌익 성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는데 여수의 보도연맹원들은 거의가 여순사건 관련자들이었다. 보도연맹은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이다.

좌익세력을 회유할 목적으로 조직된 이들은 전국적으로 30만 명에 달한다. 활동목표는 대한민국 정부의 절대 지지, 북한괴뢰정권 절대 반대, 공산주의사상 배격 등으로 요약된다. 강령에 따라 전향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는 반공활동을 했지만 6·25가 발발하자 집단 총살했다.

▲ 남해대교아래에서 가진 이충무공 노량해전 승첩제의 이순신 장군 가장 행렬 모습.
남해도 남단에는 약 120여명의 보도연맹원이 총살당한 애기섬이 있다. 이들은 주로 여수를 비롯한 율촌, 소라, 삼일, 쌍봉의 보도연맹원들을 여수경찰서 무덕관에 집결시킨 후 끌고가 재판도 없이 총살 후 수장시켰다. 오늘 역사유적지 답사에 해설을 담당한 지역사회 연구소 김병호 소장은 “국가가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죄악”이라고 설명했다.

광양만의 중심에는 묘도가 있다. 섬의 모양이 고양이처럼 생겼다 하여 묘도라고 불렸다. 최고점은 광양만을 관망할 수 있는 봉화산으로 성과 봉화대가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머물렀던 장소이기도 해서 장군에 관한 일화가 전해진다. 선사시대의 고인돌과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산성 등 역사유적이 많은 섬이다.

▲ 노량해전도
묘도 주변엔 무인도들이 섬을 둘러싸고 있는데 소당도, 누렁섬, 황도 등 섬들의 이름이 재미있다. 남서쪽에 있는 우순도는 소의 혓바닥같이 생겼다하여 이름 지어졌다는 유래가 있다. 이 섬은 1862년 진주병사 백낙신의 가혹한 탄압과 착취에 항거하여 진주민란이 일어나자, 비슷한 처지에 있던 광양의 민초들이 몰래 우순도에 와서 병기를 만들고 훈련을 하여 조직적으로 항거를 하였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도독골 또는 도독개라고 불렸던 도독포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과 진린 제독이 이끄는조명 연합군이 주둔하여 도독포라고 하였다. 정유재란이 교착 상태로 전개되면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29개의 성을 쌓고 조·명연합군과 대치 국면을 맞았다.

▲ 장군서거후 최초로 시신이 안치된 이락사가 있는 곳으로 소나무 숲이 있는 곳이다.
도독 마을은 일제 때는 그 의미를 왜곡시키려는 나쁜 뜻으로 도독(盜毒)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최근 묘도에는 광양을 지나 남해고속도로와 여수시가 직통으로 연결할 수 있는 다리가 건설될 예정이어서 머지않아 묘도의 모습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1598년 9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퇴각 작전을 시작했다. 당시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왜교성에 고니시 유끼나가(소서행장)가 진을 치고 퇴로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맞은편 검단산성에서는 권율과 유정의 조․명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 남해 충렬사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가묘.
한편 조선과 명나라 수군은 9월 20일 도독마을에 연합사령부를 설치하고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3개월간의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적군의 여러 부대는 11월 11일 철수를 시작하기로 하고 경상도쪽의 군사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철수하여 오는 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군에 의해 귀로를 차단 당했다는 것을 안 왜적들은 왜교에 있는 왜군을 지원하기 위해 함선 500여척을 이끌고 노량해협으로 왔다. 이것이 노량해전의 시작이었다.

당시 조․명연합함대는 관음포 반대편, 이순신 함대는 관음포에 주둔하여 양 해협을 지키고 있었다. 11월 18일 새벽 12시경, 이순신 장군은 원수기 밑에서 청수로 손을 씻고 백단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다.

11월 19일 새벽 2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이순신 함대의 뛰어난 전술로 왜선 200여척이 격파됐다. 왜선 50여척은 도망을 가고 나머지 함선은 관음포에서 퇴로가 차단되어 최후의 발악을 하던 중이었다. 장군은 퇴각하던 왜군이 쏜 유탄에 맞아 서거했다.

이락사는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맨 먼저 안치된 곳이다. 그 후 충무공의 유해는 남해 충렬사를 거쳐 거쳐 1599년 지금의 충남 아산에 모셔졌다. ‘장군이 떨어진 곳’이라는 좋지 않은 의미니 관음사로 고쳐 쓰자는 주장도 있지만 그대로 쓰자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 한 어린이가 조선과 명나라 일본 수군이 격전을 치른 현장에 헌화하고 있다.
일행은 제7회 이충무공 노량해전승첩제가 열리는 충렬사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조선과 명나라, 일본의 천여척이 최후의 일전을 벌인 곳에서 묵념을 한 후 그날의 격전 현장을 그리며 헌화했다.

답사회에 참여한 초등학교 4학년 김다영 양은 “오늘 여행이 좋았다”고 말했다. 여수지방해양수산청 이권배 교통관제실장에 의하면 이곳은 오동도에서는 직선거리로 22km, 묘도에서는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란다.

조국의 이름으로 산화해 가신 선조들의 흔적이 서린 역사적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와의 조우를 통해 미래 해양의 시대를 기원해본다.


덧붙이는 글 / SBS와 오마이뉴스 및 뉴스365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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