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달가스, 김세기
한국의 달가스, 김세기
  • 오문수 시민기자
  • 승인 2007.07.0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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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인물열정 1] 실천궁행의 유학자
 
▲ 죽암농장 전경
ⓒ 오문수
 

벽해가 상전으로 변한다는 것은 천재지변으로나 이루어진 변동이요,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사전에서도 덧없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요 근래에 이곳 고흥군 동강면 죽암의 푸른 물결이 넘실댄 바다 1000여 ㏊가 상전(桑田)으로 조성된 기적이 이룩되었다.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 비문 중에서)

우석 김세기 선생은 경상남도 산청에서 우리나라가 자주독립을 외치며 비로소 외부세계에 눈뜨기 시작한 3·1운동 2년 후인, 1921년에 태어났다. 부강한 농촌을 위한 농민운동과 문맹퇴치사업을 주도하다가 사업실패 후, 전라도 고흥에 건너와서 숱한 고생을 이겨내고 간척지를 개간한 선구자이며, 사서삼경을 토대로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실천한 유학자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청빈을 무슨 특권인양 여기는 양반 가장이었고, 어머니가 남의 집 바느질이나 길쌈하기 등으로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논 밭 한 뙈기 없는 가난한 집안이었다. 한 입이라도 줄여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15살 된 누나를 시집보내고, 5살 위의 형님은 남의 집 머슴살이로 떠났다.

8살부터는 남의 집 심부름과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을 하여 집안을 거들기 시작하고, 열다섯 살이 됐을 때 이영숙, 민치조, 이경생 등과 함께 ‘솔포기름계’를 조직하여 서로 돈을 모아 공동구매하고, 비어있는 허름한 범천서당을 수리하여 야간학교를 세우고 주경야독으로 배움의 욕구를 채웠다.

열일곱 살 때에는 집에서 십리 떨어진 화계의 금서공립소학교로 공부하러 다녔다. 이 학교는 근처 4개 부락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설립한 야간학교지만, ‘진흥독본’이라는 정식 교과서가 나왔고, 이듬해 ‘국어교본’을 모조리 암기해 한글을 완전히 터득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배움의 희열을 느끼던 그에게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18세)은 온 마을을 황폐화시켰다.

 
▲ 죽암농장 관리동 주변의 조경모습
ⓒ 오문수
 

태풍의 충격에서 벗어나자 마음속 깊은 곳에 내밀히 숨어있던 비상의 꿈을 이루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공부도 못하고 큰돈을 벌어 보겠다는 대장부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일본 사할린에 살고 있는 형님의 친구인 김석천에게 편지를 보내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사할린은 지금은 러시아 땅이지만 당시는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일본에 배상 조치한 일본 땅 가라후토였다. 일본음식이 우리와 달라 건강이 염려된다고 명태에 고추장을 발라 구워 싸주신 어머니의 눈물어린 전송을 멀리하고 시모노세끼에 도착한 세기는 새로운 문명을 접하고 충격에 빠졌다.

처음 타 보는 자동차, 배, 기차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데 여자들이 차내에서 음식을 팔고, 자신의 일을 가지고 산업화에 당당하게 동참하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하루 종일 달려 내린 도쿄는 높은 빌딩과 전차와 넓은 도로위의 자동차들. “이렇게 일본이 발전하는 동안 우리 조국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하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전기불도 구경 못한 두메산골에서 지내다 일주일간의 긴 여행으로 탈진한 그는 급기야 의식을 잃고 쓰러졌지만, 한 한국인의 도움으로 약속의 땅 사할린에 무사히 도착했다. 사할린은 천연자원의 보고로 석탄, 석유, 산림자원이 풍부하고 좋은 어장이 발달해 있었다.

 
▲ 우석 선생의 교훈이 새겨진 돌과 잔디 운동장
ⓒ 오문수
 

토목공사 현장과 석탄을 실어 나르는 손수레인 ‘구루마’ 미는 작업에 열중하여 몸도 피곤하고 온몸은 검둥이가 되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여 집에 송금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하루 일당이 50전이었는데 6원씩이나 되어 1개월 노동하면 조선에서 1년 일한 노임을 벌 수 있었고, 조선에서는 매일 일할 곳이 없었지만 언제나 일감이 넘쳤다.

세기가 열심히 일하여 송금한 돈으로 집안 살림도 안정이 되자 잠재되어 있던 배움의 욕망이 되살아났다. 간신히 구한 천자문을 피곤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잠을 줄이며 독학하다가, 그동안 모은 700원을 들고 나고야에서 한의원을 하는 외삼촌이 주선한 고등공민학교에 지원 신청하였다.

나고야에서는 외삼촌의 친구이자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용성을 만났다. 조용성은 당시 엘리트들이 심취된 국제공산당 비밀당원으로, “머지않아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인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징병에 나가야 하고 조선의 적인 일본을 위해 귀중한 목숨을 바치게 되는 것”이라며, 진정 공부가 하고 싶다면 외삼촌에게 먼저 명심보감을 배우고 책과 잡지를 통해 상식을 넓히라고 하였다.

 
▲ 한우 방목장
ⓒ 오문수
 

학교를 포기하고 외삼촌과 동업한 한약건재상은 실패로 끝나 다시 돈을 벌기 위해 사할린으로 돌아왔다. 선구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난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1941년이 되자 사할린에도 서서히 전쟁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일본 육군대장이 10만 명이 모인 시국강연에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문제없으니 국민모두가 총단결하자며 천황페하 만세를 부르자, 뭔가를 느낀 그는 사할린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21세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돈은 얼마 모으지 못했지만 일본생활에서 얻은 자신감이 있었다. 황금은 도둑맞을 우려가 있지만 자신감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19살의 아름다운 여인 배을식과 결혼하여 신혼의 단꿈에 젖었으나 친구들과 함께 민치우 선생으로부터 소학을 공부하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마자 중국을 점령하고 싱가포르를 탈취하였다.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자 일본은 공출과 함께 징용을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그는 지리산 깊은 곳의 화전민 마을로 숨어들었다.

지리산은 숨어살기에는 천혜의 자연환경이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소학을 자습하는 그에게 어느 날 김일성 산하에 있는 지리산 파견부대의 대원이라고 밝힌 사람이 입단을 요청했으나 정중히 거절하였다.

8.15 해방과 더불어 혼란한 정국은 좌우로 갈라져 찬탁과 반탁으로 싸우는 형국이 되었다. 동지들의 권유로 입산하여 군경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으나, 이 전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승리! 도대체 누가 누구를 이겨서 승리했고, 누구를 위한 전투였는가에 대해 회의에 빠진 그는 하산하여 격전지에서 떨어진 함안으로 이사하였다.

물외(오이)와 가지 등의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농작물을 재배하여 이리저리 장사를 다니다가 토벌군에게 붙잡혀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붓는 등 심한 고문으로 반송장이 되자 한쪽에 처박아 놓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 우사 바닥에 깔 톱밥을 만드는 톱밥공장
ⓒ 오문수
 

민족 최대의 비극 6․25는 이제 갓 피어나기 시작한 한반도를 또다시 절망에 빠뜨렸다. 전쟁이 끝나자 배움에의 열정이 되살아난 30세의 세기는 성균관대학에 진학을 신청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나고야에서는 한문학을, 지리산에서는 소학을, 이번에는 좌우익의 틈바구니에 끼어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지지리도 공부운이 없었다.

학문에의 꿈을 이루지 못한 그는 마을 이장을 맡아 좌우익으로 갈라진 여론을 하나로 묶고 원예작물, 축산 등을 통해 소득증대에 힘쓰고 덴마크처럼 부강한 농촌을 만들기 위해 ‘농촌지도식산계’를 조직하여 농민협동조합 운동을 조직하고 각 지역별로 4H 조직과 농업학교를 만들어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선구자들은 항상 혼자만 욕심을 챙기지 않고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전체에게도 이익을 준다. 산골마을에 야학을 설치하여 문맹퇴치에 힘쓰고 양계와 양돈 등 축산 사업에도 발을 넓혀 온 마을이 바뀌자 노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내가 하면서 남을 지도하고 서로 협동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잘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사막에 나무를 심어 옥토를 일궈낸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와 그룬트비(N.Fs Grundtvig)의 협동운동이었다.

 
▲ 그의 진면목을 볼수있는 일기장으로 박정희 대통령 광주유세에 관한 내용이 꼼꼼히 적혀있다
ⓒ 오문수
 

한국의 달가스가 꿈인 그는 수많은 위인들 중 도산 안창호와 인도의 성자인 간디의 사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이상촌건설에 기본을 둔 민족개조론 즉, 자주독립을 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과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어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한 선생의 정신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우리 인류의 앞길을 밝히는 가장 바람직한 사상이라 여겨, 좌익도 우익도 없이 평화 공존하여 덴마크처럼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구호아래 ‘농촌지도식산계’ 운동을 시작해 1954년에는 전국금융조합 연합회 지도자상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농민회의 세력이 커져가자 위기를 느낀 정부는 식산계를 해체시켰고, 허탈감에 빠진 세기는 마산시로 나가 미맥위탁판매 점포를 개업하였으나 부당이익을 챙기지 않고 신용을 통해 장사가 잘 됐지만 깔아놓은 외상 때문에 결국 부도가 났다.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으나 부도가 나자, 미래에 대한 희망과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세기는 바다에 빠져 죽기로 결심했다. 가족들에게 미안했지만 너무 지쳐 쉬고 싶었다. 바다 속으로 머리가 꼴깍 잠기려는 순간 뭔가가 보였다. 죽지 말고 살라는 계시처럼 배가 다가왔다.

어차피 인생은 무에서 출발하여 무로 돌아간다. 가난한 집에서 무로 시작하여 무로 돌아간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없는 것이다.

 
▲ 소사료로 쓰이는 이탈리안 라이그라스와 하얀 포장지에 싸인 조사료
ⓒ 오문수
 

마음을 고쳐먹은 세기는 라디오 하나를 짊어지고 팔도강산 유람길에 나섰다. 대관령 - 설악산- 계룡산 - 지리산 - 가야산을 거쳐 제주도 한라산을 거쳐 목포로 나가 쌀장사를 하며 알고 지내던 최남기에게 전화를 걸어 전후얘기를 하자, 고생이 많았음을 위로한 최남기는 좋은 땅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죽암간척지!

죽암간척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간척지를 만들기에 최적지로 평가하고 이미 몇 차례 사업을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해방이 되자 철수한 땅이다. 간척이 성공하면 약 200만평의 경작지가 조성되어 우리나라의 식량증산에 큰 몫을 할 예정이었다.

계약상의 문제로 1년 가까이 소비하고 가족들이 반대하였지만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중장비가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어서 일본 탄광에서 눈여겨보았던 레일을 깔고, 손수레를 자신이 직접 도면을 그려 마산에서 80대를 주문제작하여 공사를 시작했다.

10여 곳에서 간척사업을 시작했지만 한 군데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모습을 본 어민들은 고기잡이 현장을 간척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김세기는 물러나라’고 연일 데모를 하였다.

대공사에서 자금은 핏줄이다. 투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고 공사자재를 주문하느라 이리저리 뛰는 가운데서도 보사부에 쫓아가 예산지원을 요청하느라 기진맥진하였다.
1969년 봄 더 이상 자본을 빌려볼 여력이 남아있지 않을 뿐 아니라 빌린 자금의 이자도 제대로 갚을 수 없었던 어느 날 고흥 군수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군수는 국토는 국가의 재산인데 개인 자격으로 국토를 변경할 수 없으므로 이 기회에 매립권을 반납하라고 종용했다. 대인기피증이 생긴 그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인천에서 건설업을 시작했으나, 원체 성실한 성품이라 주위에서 도와주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국민주택 사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벌게 되었다.

수많은 역경과 고생 끝에 경제적 안정을 이루자 ‘김세기 공화국’에 재도전하고 싶었다. 1974년 가을 죽암지구 매립 허가를 다시 취득하고 건설부에서 공사비도 반영되어 매립공사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주변에서 방해공작이 시작되었지만 지역 국회의원인 신형식 의원의 주선으로 공사가 시작됐다.

 
▲ 정주영씨의 농장 방문시 안내하는 김세기
ⓒ 오문수
 

1975년 9월 1일에는 드디어 높이 10m, 길이 6500m의 거대한 둑이 완성된 것이다. 아래의 넓이는 130m 위쪽의 넓이 4m, 180만평의 기름진 땅이 바다 한 가운데서 솟아난 셈이다. 1979년에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1981년 보리진흥왕이 되었고, 1982년 가을에는 쌀, 찹쌀, 올벼쌀 등이 종류별로 생산되었는데 무려 500톤으로 80㎏짜리 6000가마의 쌀이었다.

1983년에는 정주영 회장이 서산 간척지공사에 조언을 듣기 위해 헬기를 타고 방문하기도 했다. 새벽에 일어나 매일 자전거를 타고 출렁이는 농작물을 바라보며 농장을 돌던 우석 선생은, 2003년 태풍 ‘매미’가 오자 걱정이 되어 여느 때와 같이 농장을 돌다 논둑으로 굴러 떨어져 병원치료를 받았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8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 하루에 매일 두번씩 농장을 순회하며 타고 다녔던 자전거
ⓒ 오문수
 

그의 농장은 육모장을 비롯하여 트랙터, 이앙기, 콤바인, 도정시설 등 대규모 논농사에 필요한 기자재를 갖추고 있다. 죽암농장의 한우는 자체 톱밥공장에서 만든 톱밥을 깔아 한우들의 배설물을 자주 치워주기 때문에 우사에서 냄새도 나지 않고 깨끗한 몸매를 유지했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가 죽암농장에 파리가 없는 것은 소나무로 만든 톱밥을 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이한 것은 이 톱밥과 한우들의 배설물을 3개월 정도 자연발효 시키면 최고의 친환경 비료가 된다. 현재 2백만평의 농장에서 연간 천톤의 친환경쌀을 생산하여 ‘금세기 쌀’이라는 자체 브랜드의 쌀을 판매하고 있으며 800두의 한우를 기르고 있다.

WTO체제 아래서 한국농업이 살 수 있는 길은 규모의 경제에 의한 집단 영농과 기계화이다. 죽암농장의 기계화된 영농은 농촌에 젊은 일꾼들이 없이 노인들만 남아있는 현 상황에 대한 대안이 되고 있다.
 
 
이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신 순천 청암대학교 문화관광과 정희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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