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 임현철 / 오문수 시민기자
  • 승인 2007.03.16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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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④] 성인봉에 오르다
 
▲ 성인봉 줄기들입니다. 강한 힘줄처럼 삶의 역동성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생의 산'에서도 꿈틀거리는 힘이 느껴지길 갈망합니다.
ⓒ 임현철
 
'성인(成人)'이 된다는 건 삶의 여정에서 완성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인식을 치른다고 성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모습은 성인인데 내면은 그렇지 못한 이가 많습니다. '인생이란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2월 28일 오전 7시 울릉도 성인봉(聖人峯)에 오릅니다. 변화무쌍한 날씨로 인해 성인봉에서 사면의 바다를 볼 수 있는 날이 50일 정도라 합니다. '성인봉에 올라 주변 경관을 감상하는 사람은 행운아'라던데 은근슬쩍 행운이 기대됩니다.

나리분지 야영장 식당의 윤영민 사장님에게 "성인봉 어디로 가야되죠?" 여쭸더니 문 앞까지 나와 "저 길로 가다가 우측으로 쭈∼욱 올라가면 등산로 안내가 나옵니다"고 안내합니다.

등산길에 섬말나리·너도밤나무·울릉국화·섬백리향·명이(산마늘)·마가목·섬황벽나무·우산고로쇠 등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식물군 안내도가 있어 기분 좋습니다. 울창한 숲과 아름드리 적송 군락, 밭 울타리의 나무 장식에서 해변 산중임을 느낍니다.

겁없이 물 한 방울 넣지 않고 나선 겨울 산행입니다. 명산은 목마를 즈음 물이 있다더니 그냥 약수가 아닌 '신령수'를 만납니다. 성인이 되려는(?) 길에 만난 신령, 되게 반갑습니다. 성인봉과 신령수. 이름 궁합이 너무 잘 맞습니다.

성인봉 겨울산행, 설피를 빌려 신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 니리골에서 성인봉으로 가는 길에 만난 길 풍경들입니다. 마치 쉬어가라 하는 것 같습니다.
ⓒ 임현철
 
원시림에서 겨울, 아니 봄이 오는 길목에 대하는 낙엽 밟는 소리가 묘한 여운을 안겨줍니다. 눈이 눈에 띄게 많아집니다. 눈과 얼음으로 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일한 겨울산행 장비인 아이젠을 꺼냅니다. 출발 전, 오문수 선생님 "어이, 아이젠 챙겼어?" 강조하시던데 그 효력을 발휘할 것 같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둘 다 처음 보는 아이젠을 착용합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신발 신었을 때와 촉감과 소리부터 다릅니다. 발에 눈이 착착 달라붙습니다. 이래서 아이젠을 착용하지 싶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의 고영환씨에게 설피를 빌려 신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등산로를 따라 설치한 말목과 밧줄이 묻힐 정도로 눈이 쌓였습니다. 눈이 거의 내리지 않은 여수 사람에게 은백의 땅, 가식 벗은 나무들, 그리고 파란 하늘이 서로 어울린 광경은 정말이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세상살이에 찌든 마음 찌꺼기들 한순간에 사라질 것 같습니다.

생명의 샘을 만납니다. 주위가 눈 속에 얼어 있는 가운데 쉼 없이 졸졸 흐르고 있습니다. 마치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라는 노래처럼 토끼 되어 물만 먹습니다. 차갑지만 따뜻합니다.

성인봉 경치,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 성인봉은 산 등성이에 나무 의자를 두고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가라합니다.
ⓒ 임현철
 
 
▲ 생명의 샘인 깊고 깊은 옹달샘을 만납니다. 삶에서도 이런 생명의 샘을 만날 때가 올 것입니다.
ⓒ 임현철
 
성인봉 정상이 10m 남았음을 알려주는 이정표 위로, 다녀간 산악회 표시가 매달려 있습니다. 그 모습이 제(祭)를 지낼 때 나부끼는 깃발 같습니다. '이들은 성인봉에 올라 무슨 생각 했을까? 하늘에 제사 지내는 마음으로 섰을까?'란 생각이 스칩니다. 그 틈새로 '얼마 남지 않은 성인봉,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해야지' 하는 마음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시조처럼 두 시간여 만에 마침내 성인봉(해발 984m)에 올랐습니다. 산 모양이 성스럽다는 성인봉 표지석이 멀리서 보면 성인 형상처럼 보이겠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돌부처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햇살 머금은 동해 바다와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이 무릉도원을 연상케 합니다.

과거 울릉도를 '무릉도'라 불렀다는데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입니다. 연평균 300일 이상 안개에 싸여 그 신비로움을 더한다는 성인봉. 오늘은 안개 베일을 벗고 사방으로 바다를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행운입니다. 삶의 한줄기 빛이라 믿고 싶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에 구름이 뭉게뭉게 흐르고 있습니다. 아내와 통화를 시도합니다.

"여보, 성인봉이네. 같이 와서 함께 서야 하는데…, 미안허네."
"'같이 와서 함께 볼 건데…'란 말, 백이면 백, 다 거짓말이라고 하데요. 하하."
"어이. 같이 왔으면 아쉬움 전하는데 왠 초치는 말?"
"아니에요. 많이많이 즐겁게 감상하다 오세요."


 
▲ 산 모양이 성스럽다는 성인봉 정상입니다. 표지석이 마치 성인 형상 또는 돌부처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 오문수
 
 
▲ 성인봉 줄기 사이로 보이는 바다입니다. 흙백으로 봐도 하늘인지, 바다인지 그 경계를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혜안의 눈은 구분이 가능하겠지요.
ⓒ 임현철
 
 
▲ 성인봉 줄기 사이로 보이는 바다입니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그 경계를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 임현철
 
나무의 얽히고설킴에서 생명의 존재 욕구를 보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측량법령에 따라 우리나라 모든 측량의 기준이 되는…'으로 시작되는 안내문. '안'자의 'ㅏ' 중 'ㅡ'이 달아 '인내문'으로 읽힙니다. 이것마저 성인봉, 성인봉 표지석, 신령수와 함께 삶의 여운으로 남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오문수 선생님,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 렌즈에 잡으려고 무던히도 애쓰십니다. 얄밉게(?)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른 나뭇가지에도 새 생명이 움트고 있습니다. 아름드리나무를 타고 올라 본(母) 나무에 기생하는 나무들의 얽히고설킴에서 치열한 생명의 존재 욕구를 엿봅니다.

지금은 텅 빈, 지난해 새끼를 낳아 길렀을 법한 새 둥지도 보입니다. 속이 빈 나무도 건재하게 아직 그 자리에 서서 세월의 지나감을 맛보고 있습니다. 찬바람이 몸을 타고 지나갑니다.

경기도 부천의 가족과 떨어져 홀로 죽암교회에서 2년여 동안 목회 활동을 펼치고 있는 형과 마주칩니다. 그동안 정신없음으로 인해 연락을 거의 주고받지 못했는데 하얀 설경 속에서 대하는 핏줄이라니. 그 알싸함이 다가옵니다. 핏줄이란 이런 건가 봅니다.

지난해 상영했던, 신하균·원빈 주연의 <우리 형>을 보며 '제게 핏줄이지. 형에게 전화해야겠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 전화를 못 했는데, 글쎄 울릉도에 간다고 처음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울릉도 오기 전 "어머니, 울릉도 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아야, 잘했따. 그란 해도 한 번 가봐야 쓴디, 못 가 봐, 그거시 그리 마음에 걸리더니 니가 가는구나, 잘했따"며 반가워하셨었습니다.

 
▲ 오문수 선생님,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 렌즈에 잡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십니다.
ⓒ 임현철
 
 
▲ 나무들의 얽히고설킴에서 치열한 생명의 존재 욕구를 엿봅니다. 지금은 텅 빈, 지난 해 새끼 낳아 길렀을 법한 새 둥지도 보입니다.
ⓒ 오문수
 
깨달음과 지혜를 선사한 보시(報施)의 '배 한쪽'

산행 길을 이끌어 주던 아이젠을 벗고 신령수에 이릅니다. 신령이 남긴 물을 마시려는데 오문수 선생님, 일회용 접시에 배 반쪽 놓여 있는 걸 보시고 "목마르고 배고픈 여행자가 한쪽을 먹고 허기를 면하라고 남겨둔 배다"시며 "한 쪽을 먹지 않으면, 남겨둔 사람의 보시(報施)를 외면하는 거다"고 말하면서 나눠 먹기를 요청합니다.

접시에 담긴 배의 의미를 알아채시는 선생님, 대단하십니다. 약간 시들한 배지만 기꺼이 한 입 베어 뭅니다. 눈 쌓인 겨울에 상할 리 없겠지요. 설사 상했던들 그 아름다운 마음 못 먹겠습니까. 원효대사에게 깨달음을 선사한 그 유명한 '해골바가지' 일화(逸話)가 떠오릅니다.

배 보시에 대해 오문수 선생님은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생기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과 공덕을 지어 그 공덕의 힘으로 지혜와 자비로 가득 찬 깨달음을 준 지혜의 과일이었다"고 술회하십니다.

인생의 산에 오르면서 부단한 노력과 열정 쏟았을까? 겉은 성인인데, 내면도 과연 성인일까? 이렇게 성인봉은 우릴 '성인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게 설령 도로 아미타불이 될지언정.

 
▲ (위 좌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설피, 아이젠, 신령수, 보시의 배.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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