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횡재다, 횡재"
"야! 횡재다, 횡재"
  • 임현철 시민기자
  • 승인 2007.02.04 1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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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선물에 얽힌 사연
'이게 좋을까? 저게 나을까? 뭐로 사야 하지?'

선물할 때면 몇 날 며칠 고민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부모님께 드릴 선물은 그 고민의 폭이 더욱 컸습니다.

언젠가 부모님과 아이 모두 '선물로 현금을 더 선호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본 후 그 고민의 폭이 약간 줄었지만, 왠지 부모님 선물을 현금으로 드리기엔 뭔가 부족하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 집에서 만든 케이크.
ⓒ 임현철
어느 때부턴가, 가족 생일이면 케이크는 2남 2녀 중 막내인 내 몫이었습니다. 지금도 가족 중 누구(?)도 생일 케이크를 사려 하지 않습니다. 무슨 연유였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한두 번 샀을 뿐인데.

덕분에 부모님 연세는 확실히 기억합니다. 불을 밝혀야 할 '생일 초'를 덤으로 꼭 받아야 했으니까. 아내가 케이크를 만드는 법을 배운 뒤 지금은 온 가족이 함께 집에서 만들어 아버님댁으로 가져갑니다.

아이들이 글을 알아갈 즈음, 아버지께선 손자들이 쓴 생일 축하편지 선물을 보고 웃으시며 다짜고짜 말씀하셨습니다.

"아이, 니넌 빠나나 선물했지?"
"(무슨 말인지 몰라) 예∼ 애?"
"아드라(아이들아) 느그 아빠는 옛날 할아버지 생일 때 빠나나를 줬단다. 그때넌(는) 빠나나가 아주 귀했지. 맛도 좋았고. 꿀맛이었지. 이 할애비는 그때가 제일 생각난다. 그랬는디 저리 커서 아그들 낳고…."


초등학교 시절이던 70년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바나나는 어버이날 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선 생일로 말씀하십니다. 이게 뭐 대수로운 건 아닙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다 우물우물 삼키셨던 말줄임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제야 생각하건대 '어린 애가 가정 꾸려 살고 있으니 세월 참 빠르다'란 그저 단순히 당신 삶의 뒤안길을 되짚는 내용은 아니었을 성싶습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나이 먹어 손자들 편지를 다 받네. 우리 아부지도 이리 사셨어야 했는데'란 말씀이 아니셨을까, 짐작됩니다. 할아버지께선 일찍 돌아가셔서 기억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내겐 할아버지이신 아버지의 아버지가 생각나셨던 것일 게다, 추측됩니다.

지난해 아버지 생신 전에 어머니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아야, 느가부지(너희 아버지) 참 이상타. 한 달도 되기 전에 자기 생일이다고 빨갛게 크게 똥그라미를 쳐놓고 들여다보고 그랬다야. 느가부지 나이 묵고 왜 근다냐?"
"왜 글긴 요. 나이 드셨으니까 글죠?"
"아부지, 무슨 선물 원하세요?"
"돈 들어갈 때도 많은디, 선물은 무슨. 니 마음이믄 됐따아."


지난해 내 생일날 아이들이 "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저희 선물이에요"하며 슬며시 편지와 함께 선물로 수첩과 큰 열쇠고리 인형을 내놓았습니다.

 
▲ 아이들 선물.
ⓒ 임현철
"(니들이 뭔 돈이 있다고) 아빤 선물 필요 없는데. 근데 언제 준비한 거야? 고맙구나. 무슨 의미로 이걸……."

[딸 유빈] "아빠가 글 쓰시잖아요. 가지고 다니시던 수첩이 거의 다 됐대요. 여기에 새로 적으시라고요."
"야! 횡재다 횡재. 수첩 다 써가는 거 언제 봤∼써?"
[딸 유빈] "아빠, 수첩 봤더니 몇 장 안남았대요."
"그래, 그거 봤구나. 고마워∼어. 아빠 더 열심히 써야겠다. 잘 쓸께."

[아들 태빈] "아빠, 전에는 열쇠고리에 우리 사진이랑 갖고 다니시더니 (요즘은) 열쇠만 있대요. 그래서 샀써요."
"그랬써∼어. 태빈이 생각하고 달고 다닐께∼에. 고마워∼어."


'근데 너무 크다. 저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려면 주머니가 불끈(?) 솟아야 한다. 이를 어쩌. 그래도 당분간은 할 수 없지.'

입 꼬리로 피식 웃음이 흘렀습니다. '아니, 저것들이' 하면서도 내심 뿌듯했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께 드렸던 선물에 대한 아버지의 추억도 이런 맛일까? 그래서 드렸던 바나나 맛을 곰곰이 되새기셨을까?

올해 아버지 팔순입니다. 어느 시점이 되면 아버지처럼 내게도 그런 때가 올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이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선물 아닐까? '돌고 도는 인생 선물'.

부모 자식 간은 떠나보내는 사랑이라더니 부모에 대한 내 사랑이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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