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세계를 그려 청산도라 했던가
선원세계를 그려 청산도라 했던가
  • 오문수 시민기자
  • 승인 2007.02.02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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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를 으뜸으로 여기며 사는 청산도 사람들
 
▲ 완도항에서 배를 타고 가던도중 본 일몰 장면
ⓒ 오문수
 
완도읍에서 19.2㎞ 떨어진 청산도는 여객선으로 약 40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5개의 유인도와 9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섬이다. 청산도는 원추형으로 소라모양이며 해발 343.4m로 면적은 42.78㎢로 해안의 굴곡이 심한 편이다.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여 외양에 있으면서도 포구가 발달한 양향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기록으로는 1806년 선조 46년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적혀있다.

청산도는 옛날에 선산도 또는 선원도라고 불러왔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태종실록> <세종실록> <중종실록> 등을 보면 선산도에 왜구가 출몰하여 생포하거나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전인 1555년에는 왜선 육칠십여 척이 출몰하여 왜구의 수가 6천여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이유는 이 해역에 해산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해류와 조류의 중간 목이고 섬을 조금만 벗어나면 제주나 일본 해역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데서 연유한다.

1681년 조선조에 청산 만호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청산도로 정착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청산도에 청해진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읍리에는 옛 읍터 인 향교 골 옛 성터가 아직도 남아 있고 하마비와 지석묘군도 마을 앞에 남아 있다. 또한 청해진의 한(韓)장군 석계묘와 사당이 당리에 남아있어, 장보고 시대의 유적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청산도에 가다

 
▲ 당리재에서 본 포구 모습
ⓒ 오문수
 
청산도는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고종24년 1887년에 영국이 군함 10척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하자, 영국함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청산진의 병력으로 거문도진을 설치하기도 했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중심지이자 바다 낚시의 천국으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닷물과 온화한 청산항은, 1980년대까지 고등어와 삼치 파시가 열려 일본의 무역선이 직접 들어와 삼치를 사갔다. 한 주민의 얘기로는 당시 진짜 참치는 거의 일본으로 수출하고, 1㎏ 이하의 '고시'라 불리는 삼치만 국내 시장에 팔았다.

수출용 참치는 정말 맛있는데 '고시'만 먹은 한국인들은 참치가 별로 맛없는 줄로만 안다고 안타까워했다. 70년대 한참 시절이 좋았을 적에는 개도 만원짜리 돈을 물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었고, 당시 주민의 수가 1만3000여명에 달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2700명이며, 노령화율이 35%에 달한다.

산업구조는 87.6%가 1차 산업에 종사하며 특히 다른 섬과 달리 80%가 농업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농사는 첫째조건이 물이다. 청산도는 여느 섬과 달리 물이 많다. 이는 300m가 넘는 매봉산(384m), 보적산(330m), 대봉산(379m)이 주요 농지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어 관개용수 확보가 여타의 섬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다.

청산도가 근래에 주목을 받게된 이유는 우리나라 영화 사상 최초로 백만 관객을 돌파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와 윤석호 PD의 <봄의 왈츠>가 이 섬에서 촬영되고부터다. 기자가 이 섬을 찾은 것은 '초분'과 '구들장 논'에 관심이 있어서다.

 
▲ 백련사 올라가는 길목의 동네 골목길
ⓒ 오문수
 
완도에서 마지막 배를 타고 밤에 도착하여 모텔에 여장을 푸니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이 집에서 두 영화감독과 스태프가 묵었다고 한다. 초분이 있다는 현장과 구들장 논을 물으니 약수터 가는 길에 있으니, 내일 새벽 5시 30분에 운동할 겸 약수터에 같이 가잔다.

식당 주인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그들의 애환을 들었다. 한때는 학생수가 천명이 넘는 학교를 포함한 4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2개 밖에 남지 않았고, 중학교도 청산중이 37명, 청산중 동분교도 10명 밖에 안 되는 소규모의 학교로 전락했다.

"사는 데 가장 애로사항은 뭡니까?"하고 묻자, "TV가 있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사는 것과 문화혜택을 못받는 게" 가장 애로사항이란다. 어선이 있지만 규제가 심하고 영세하여 본격적인 어업에는 종사하지 못하고, 낚시를 하여 살아가지만, 농협과 수협에 빚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단다. 돈 있는 사람도 보증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다시는 쉽게 못올 것 같아, 작정을 하고 새벽 약수터 운동을 나서는 아주머니와 전직 군의원이셨던 부부와 함께 깜깜한 새벽길을 따라 나섰다.

지나가는 길 옆에 최근에 새로 만든 2기의 초분과 인근에 다랭이 논이 많다는 '선음약수터'에 갔다. 깜깜한 밤이라 발밑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앞사람 발자국만 뒤따르며 섬의 역사와 사는 이야기, 애환 등을 들으며 한참을 올라가는 데 "여기 바로 위에 초분이 2개 있어요" 한다.

"아주머니 애들은 무서워하지 않을까요?" 하고 물으니 "왜 안 무섭겠어요?" 한다. 초분은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관을 땅이나 평평한 돌 위에 놓고 이엉으로 덮어서, 3년 정도 둔 다음 육신이 삭아 없어져 뼈만 남아있을 때, 지관이 좋은 날을 택일하여 땅에 묻는 풍습을 말한다.

초분과 다랭이 논

 
▲ 위쪽이 어머니이고 아래쪽이 아들 초분. 자손들이 다녀갔다는 의미로 소나무가지를 꽂아놨다
ⓒ 오문수
 
초분은 지방에 따라 초빈(草殯)·외빈(外殯])·소골장(掃骨葬)·초장(草葬) 등 다양하게 불린다. 자손들은 가끔씩 들러 초분에 별일이 없나를 관찰하고, 매년 이엉을 새로 갈아준다. 그때 왔다 갔다는 의미로 소나무 가지를 이엉 위에 꽂는다.

시신에는 옷이 썩지 않도록 비단옷을 입히지만 형편에 따라 삼베옷을 입히기도 한다. 정식으로 매장할 때는 뼈를 깨끗이 씻거나 찧어서 살을 모두 떼어낸 다음에 매장을 하기도 하며, 세골장(洗骨葬) 또는 증골장(烝骨葬)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초분은 유골을 처리하기에 앞서 먼저 육신을 처리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부터 <수서> 고구려전 그리고 <삼국유사> 등에 이르기까지 고대의 장례에 대한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지석묘나 백제 초기의 옹관묘 등도 그 구조로 보아 뼈만을 묻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조사에 따르면, 조선 말기까지는 육지지방에서도 이러한 초분이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요즘에는 주로 서남해안의 도서지방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다.

 
▲ 속초와 강릉에 폭설이 내리고, 대관령에 통행금지령이 내린 가운데 핀 청산도 유채꽃
ⓒ 오문수
그 가운데에서도 전라도 지방에서는 특히 이 초분이 씻김굿 즉, 무속의 사령제(死靈祭)와 복합되어 나타나고 있어 학술적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러한 세골장은 태평양을 둘러싼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초분을 통해서 뼈만을 가려내어 매장하는 장법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고방식에서 나온 관습으로 보인다.

첫째, 살은 더러운 것으로, 땅 속에 매장함으로써 땅을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둘째, 뼈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셋째, 뼈를 땅에 매장하는 것은 뼈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함께 지하에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넷째, 육신을 바로 땅 속에 매장하는 것은 박정한 것으로서, 육신을 조금이라도 더 지상에 두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다. 다섯째, 육신은 완전히 죽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탈육이 된 뼈로써 비로소 죽음을 확인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여섯째, 지상에서 탈육을 시켰을 때에라야 뼈가 검게 되지 않고 희게 되기 때문에 뼈를 깨끗이 하여 지하에 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등이라고 하겠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참고)

특히 음력 1~2월에는 시신을 땅에 바로 묻으면 지신이 노해서 마을이 큰 화를 입거나 다른 사람들이 해를 입기도 한단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어업에 종사하는 옛날 섬사람들에게는, 천지의 조화를 담당하는 신을 노하게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중대한 일이다. 겨울에 초분을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아침을 먹은 후 마을 사람들이 가르쳐준 위치를 찾아 나섰다. 도청리 길 아래쪽에 있는 2기는 어머니와 아들, 선음약수터 가는 길에는 할머니와 손자, <서편제>와 <봄의 왈츠>를 촬영한 당집 아래에는 1기가 있었다.

청산도는 효를 중시하는 관습이 어느 곳보다 깊어 가족묘가 대부분이며 비석도 다른 지역보다 많다는 게 주민의 얘기다. 젊은 나이인데도 초분을 한 것은 '할머니가 아직 조상의 묘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손자가 어떻게 묻힐 수 있느냐'는 생각에서며, 어머니와 자식의 초분도 마찬가지다.

선음약수터 위의 다랭이논을 둘러봤다. 높이 2m 정도나 쌓아올린 논두렁이에 올라가 보니 넓이가 겨우 4~5m에 불과했지만 논을 일궈 경작했을 섬주민들의 삶에 대한 의지와 지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섬에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들이 여러개나 되어 논농사 짓는데 이용됐단다. 일할 사람이 없어 묵힌 다랭이 논을 세어보니 50여 계단을 이룬다.

 
▲ 다랭이 논
ⓒ 오문수
 
청산을 찾으려면 섬사람들의 용어를 알면 훨씬 재미있고 친근감을 느낀다. 마을의 지명이 바로 이해된다. '여'는 바닷물이 나갔을 때는 보이고, 들어왔을 때는 안보이는 부분을 의미하고, '개'는 바닷가의 후미진 곳이며, '부리'는 산이 뻗어나가다 끝나는 부분을 의미한다.

한국인의 한을 판소리를 통해 훌륭하게 그려낸 <서편제>의 명장면이 있는 당리에 갔다. 소리꾼 부녀와 의붓 남매의 기막힌 삶을 그린 돌담길과 당집을 둘러봤다. 유봉이가 송화랑 '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데 당집은 더없는 소재다.

방송에도 나온 범바위

 
▲ 서편제와 봄의 왈츠의 배경이 된 골목길. 뒤편에 소나무에 둘러쌓인 당집이 보인다
ⓒ 오문수
 
시간이 없어 지나가는 차를 세우고 태워달라고 부탁했는데 알고 보니 민정시찰을 오셨던 면장님이다. 섬에 대한 필요한 정보나 자료를 친절하게 챙겨주셨다.

택시를 타고 간 도착한 곳은 <스폰지> 프로그램에도 나왔다는 범바위다. 아주 오랜 옛날 호랑이가 청산도에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고개재에서 바위를 향하여 "어흥" 하고 포효하니 이 바위의 포효성이 호랑이보다 더 크게 울려 "나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여기에 살고 있구나" 하고 도망쳤다는 바위는, 철분이 자기장을 많이 띄어 나침반이 말을 듣지 않는단다.

 
▲ 자기장이 세서 나침반을 마비시키는 범바위
ⓒ 오문수
 
곳곳에 '구들장 논'이 있지만 실제로 경작을 하며 윗논에서 아래논으로 물이 흐르도록 물구멍을 만든 현장으로 갔다. 구들장논이란 산비탈이나 구릉에 마치 구들장을 놓듯 돌을 쌓아 먼저 바닥을 만든 뒤, 그위에 다시 흙을 부어 다져서 논을 일군 것이다. 옛날 척박하고 비탈진 땅을 개척하여 기름진 땅으로 가꾼 섬사람들의 슬기와 개척정신이 배어 있는 삶의 유산이라 하겠다.

 
▲ 구들장 논의 물구멍. 돌은 크기에 따라 아래부터 위로 쌓았다
ⓒ 오문수
 
물구멍 주위는 두께 25㎝, 넓이 1㎡ 정도의 큰 바위를 무너지지 않게 배치하고, 구멍의 깊이는 논마다 다르지만 약 2m쯤이며, 지름은 약 30㎝정도였다. 또한 바닥에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았지만, 물빠짐이 심해 곳곳에 둘레 3~4m의 보를 만들고 땅심을 키우기 위해 퇴비를 이용했다.

1800년대 성명미상의 도승이 부흥리 대봉산(379m) 중턱에 창건했다는 백련사에 갔다. 법당 관음전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뒤쪽에 후불탱화를 비롯 좌우 3개의 탱화가 있다. 속초와 강릉에는 폭설주의보가 내리고 대관령은 통제됐다는 데 이곳 날씨는 가을 날씨 같다. 더워서 잠바를 벗고 한참을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상념에 젖어있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처마끝 '풍경' 소리가 숙연케 한다.

내려 가려는데 개짖는 소리에 한 노인이 나와서 차 한 잔 하라며 권한다. 서울에서 오셨다는 그 분은 딸이 스님이 되어 여기까지 와서 너무 외로울까봐 부부가 내려와 있단다. "출가했는데 뭘 그러세요" 하자 "그래도 부모는 안 그래요" 하신다.

울창한 동백숲 속 스티로폼 상자 속 쟁반 위에 쌀이 놓여있어 물었다. "새들 먹으라고 이렇게 쌀을 놓아두셨어요?" 하고 물으니, "얼마 전 매에 채여 다친 비둘기 한 마리를 치료해주고 날려 보냈는데 계속 찾아와 먹으라고 둔 쌀로, 다른 새들도 와서 먹어요" 하신다. "잠깐 여기 와서 보세요" 하길래 가보니 유리창에 불투명 테이프를 가득 붙여놨다.

 
▲ 유리창에 비친 나무와 산 그림자에, 새가 부딪히자 테이프를 부친 모습
ⓒ 오문수
공기가 너무 맑고 좋아 새들이 유리창에 비치는 산 그림자를 보고 날아와 부딪혀 다치지 않도록 테이프를 붙여 놨단다.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진리의 세계를 바로 보라는 것이며, 정사유(正思惟)는 중생들이 욕심을 버리고 언제나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마음으로 바른 판단을 하고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해탈에도 이른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 아닌가? 번듯한 법당 하나 없지만 어느 절 못지않은 감명을 받았다.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우문처럼 던지며, 말없는 민중들은 다 아는데 무지한 국민인 줄로만 알고 이익만 좇아 삭발하기도 하고, 각목으로 싸우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

맑은 날이면 한라산이 보인다는 망망대해에 안개가 자욱하다. 가슴 속 안개가 걷힐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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