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활 쏘고 군관 춤추던 곳 ‘해운대’
장대와 함께 후손들 기념비라도 세워야
충무공 활 쏘고 군관 춤추던 곳 ‘해운대’
장대와 함께 후손들 기념비라도 세워야
  • 남해안신문
  • 승인 2007.01.1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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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석의 향토순례 7] 전설이 살아 있는 곳 ‘한려동’
▲ 오동도

1591년(선조 24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진도군수·정읍현감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하여 좌수영(左水營:麗水)에 부임한 뒤 군비 확충에 힘쓴 이순신 장군.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께서 임지인 여수 곳곳에 발길이 머물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랴만 그중 ‘해운대’(海雲臺)는 각별하다.

수정동 서쪽 종고 산 동쪽 기슭의 활 쏘는 곳으로만 추정되는 이곳의 정확한 위치파악은 주민들에게 수소문을 하여도 알 수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지만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2월12일 (계묘) 맑고 바람도 고요하다: 식사를 한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해운대(海雲臺)로 자리를 옮겨 활을 쏘았다. 침렵치(沈獵稚)를 구경했는데 매우 조용했다. 군관들도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趙而立)이 시 절구를 읊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고찰해볼 때 지금이라도 보다 확실한 고증(考證)작업을 거쳐 ‘해운대’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비라도 세워두는 게 좌수영 영민 후손임을 자처하는 여수시민들이 할 일이 아닐까 싶다.

부산의 해운대는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가야산(伽倻山) 입산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그 경치에 반하여 동백섬 동쪽 벼랑 바위 위에 자신의 호를 따서 해운대라고 쓴 데서 유래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경치에 감탄한 유명인의 호가 누대를 걸쳐오며 오늘까지 이어져오는 것에 비해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고자 글자그대로 피땀 흘렸던 군사조련장인 여수 해운대는 지금 그 위치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 가슴이 아플 따름이기에. 수정동은 나무가 많아 한 때 수동(樹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장대(將臺)너매(장대 너머의 뜻)’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여기서 장대는 이 순신장군의 지시로 기마(騎馬)를 비롯한 무예훈련장으로 쓰였던 곳으로써 현재의 여수고등학교 자리를 일컫는 지명이다. 해방 전 현재의 여수역(驛)이 생기면서 교통의 요지로 탈바꿈한 수정동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속칭 ‘미나또마찌’(港町)라 불렸다.

▲ 여수고등학교
이는 1932년 현재의 신 항이 개항했기에 부쳐진 이름이다. 그 후 해방이 되자 물이 맑다는 뜻이 내포된 수정동으로 명칭이 다시 바뀌었는데 이는 당시의 동장이 건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명칭도 1997년 2월 25일 3여 통합에 따른 동 통합으로 수정. 공화동이 통합되면서 오동동(梧桐洞)으로 잠시 불리다가 1998년 2월 1일 주민들의 청원으로 동명을 한려동(閑麗洞)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려수도의 머리글자를 따 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한려수도가 경남 한산도에서 전남 여수까지를 이르는 바다 길임을 생각할 때 그 거리감으로 인해 쉬 납득하기가 왠지 주저되는 바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오동동’이 대중가요 노래가사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주민정서에 맞지 않다는 주민 다수의 여론을 수렴, 한려수도의 기점이며 한려해상국립공원인 오동도를 연상시키면서 관광여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개칭했다는 설명을 듣고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료제공 : 까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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