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맥 조이고 푸는, 명고수
소리 맥 조이고 푸는, 명고수
  • 남해안신문
  • 승인 2006.12.27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정화의 우리소리]

소리꾼이 소리를 잘하고 못하고는 고수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수는 단순한 반주자가 아니라 소리의 맥을 조이고 푸는 지휘자의 역할까지 해야 한다.

옛날 이날치라는 사람이 장단을 잘 못 쳐 소리꾼에게 북채로 눈이 찔려 애꾸눈아 되었다는 일화는 소리의 길을 헤쳐 주는 고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한 예이기도 하다. 명창에 비해 명고수가 적은 것만 보아도 북은 어쩌면 소리보다도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수는 옛날부터 천대를 받아왔다.

소리꾼이 가마를 타고 의젓하게 갈 때 고수는 북통을 맨 채 하인처럼 뒤에서 걸어가야 했다. 보수도 소리꾼의 절반도 받지 못했다. 하다못해 밥상에까지 차별이 있었으니 고수의 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고수를 집어 치우고 소릿길로 접어든 사람도 상당수에 달했다. 송홍록의 동생 송광록과 적벽가 중 ‘조자룡 활 쏘는 대목’을 특히 잘 불렀다는 주덕기 등은 고수를 하다가 명창이 된 사람이었다.

그러한 일들은 5명창 시대에 이르러 많이 나아졌다. 특히 한성준의 경우에는 소리꾼들이 오히려 그에게 매달리는 형편이었고 5명창의 북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한다. 뛰어났던 명고수 몇 사람을 살펴보자.

김명환은 광대 집안 출신이 아닌 양반집자손이라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20세가 다 돼 가도록 학교 공부만 하던 그는 결혼 후 처갓집에 놀러갔다가 북도 못 친다고 놀림을 받고는 고수가 될 결심을 굳혔다 고한다.

지방의 내 노라는 고수들에게 북을 익혀 서울로 올라온 김명환을 박녹주와 김여란 등은 북솜씨를 인정했지만 양반집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물에 기름돌 듯 해 소리판에서 설움도 많이 받았다.

소리꾼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마침내 김명환 의 북솜씨를 따를 소리꾼이 없다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다. 평생의 고집과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1978년 그를 판소리 고법문화재가 되게 하였다.

김명환의 북에 비해 김득수의 북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도 고수는 소리꾼을 받쳐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북은 장단을 정확히 짚어서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게 소리를 받쳐주어야 하는 법이여 차가 잘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닦아야 하는 것처럼 북이 장단과 추임새로 소릿길을 닦아주어야 혀” 김득수가 이런 신념을 갖게 된 데는 아마도 북보다 소리를 먼저 배웠기 때문 일수도 있다.

그는 진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동네 제일의 북잽이였고 집안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음악적 분위기에 싸여 있어 일찍 소리에 눈을 떳다.

명창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나 소리꾼으로서 대성하지 못하고 한성준에게 북을 배워 고수 노릇을 하다 보니 북으로 인간문화재까지 되었노라고 그는 말하곤 했다.

소리판에서 그는 북만 치는 게 아니라 소리꾼과 호흡을 맞춰 그때그때 소리꾼이 던지는 재담을 받아넘기는 솜씨가 남달랐다.

특히 ‘제비 몰러 나간다’라는 광고로 유명했던 박동진 명창과 주고받는 재담은 언제나 소리판에 활기와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김득수는 어느 소리꾼에게나 환영받는 믿음직한 명고수임이 분명했다.

일 고수 이 명창. 소리꾼의 소리를 죽이고 살리고 가 고수의 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님을 필자 또한 한 사람의 소리꾼으로서 잘 아는 바다.

소리꾼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 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줄 수 있는 고수, 엊그제 황진이 에서 거문고에 새겨진 ‘지음’ (소리를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친한 벗)처럼 소리꾼과 마음을 나눠 눈빛만 봐도 소리꾼의 상태를 읽을 수 있는 고수야 말로 재주를 뛰어넘는 명고수가 아닐까한다. 더불어 소리꾼으로서 그런 명고수 와 소리를 할 수 있음이 또한 행복이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