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성적표에서 찾은 '조선어' 과목
일제시대 성적표에서 찾은 '조선어' 과목
  • 임현철 시민기자
  • 승인 2006.12.14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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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초등학교 시절을 통해 본 우리네 역사
 
▲ 아버지
궁금했던 아버지의 삶. 그 삶 속에는 어떤 그 무엇이 들어 있을까? 고생과 노력 이면에 우리네 역사와 더불어 당신 유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아이들과 방문한 부모님 댁에 앉자마자 아버지께서는

“아이, 이것 좀 봐라”
“아버지, 이런 게 있었어요?”
“그래, 맻 년 전에 나가 초등학교를 찾아가 뗐다”
“어찌, 이걸 뗄 생각을 하셨어요?”
“일본 놈들이 전쟁을 위해 강제 동원했던 증거를 찾아 옛날 다녔던 초등학교를 찾았지”

당신은 아들에게 들뜬 목소리로 초등학교 성적표를 내놓으셨다. 아버지의 유년(幼年)의 성적표는 날 아버지의 과거,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전 일제시대 초등학교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

막상 당신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살펴보니 잘 알아볼 수가 없다. 온통 한문이다. 지금에야 우리글로 작성해 한 눈에 알 수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한문 성적표를 꼼꼼히 살필 수밖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생년(生年)이 소화(쇼와, 昭和) 4년이란 연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을 ‘선조 25년’이라 부르는 것처럼 히로히토 일왕의 연호를 붙이고 있다. 아버지의 어린시절에서 일제의 잔재를 확인한다. 아버지는 세계대공황이 시작됐던 1929년 생이니까 우리나이로 79세이다.

주소는 산양읍 삼덕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본적은 여수군 여수읍(현, 전남 여수)으로 나온다. 먹고 살기 힘들어 어머니, 그러니까 할머니 친정으로 이사해 사셨다던 경상도 생활이 나타나 있다. 일제시대와 세계대공황 만으로도 겪었을 생활고를 알만하다.

 
▲ 아버지 초등학교 시절 성적표

다음으로 산양초등학교 입학년월일이 소화 16년(1941년) 2월 20일이 보인다. 4학년부터 학교를 다니셨다는데 산양으로 이사 후 학교를 열심히 다니셨던 흔적을 발견한다. ‘설마 산입에 거미줄 치랴?’는 속담처럼 학교는 엄두도 못 내던 어려웠던 시절, 굶어 죽기는커녕 학교까지 다녔으니 아버지는 외가 덕을 톡톡히 본 모양이다.

아버지가 4학년이던 1941년이면 우리나이로 14살.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2학년 나이인데 늦게 학교에 다닌 것이다. 서당에서 학교로 전환되던 시절이던 그 때는 늦깍이 학생들이 많아 같은 반에서도 다양한 연령대 학생들이 함께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화 19년(1944년) 3월 20일, 해방 1년 전인 17세에 초등학교 졸업을 하셨다. 그 아래로 보호자란에 아버지의 아버지, 내게는 할아버지인 임영삼 이름이 적혀 있다. 농사일을 하셨던 할아버지 외에는 그 무엇도 파악할 수 없다.

좌측 상단으로 올라가니 본격적인 과목과 성적이 나온다. 국어ㆍ산술ㆍ국사ㆍ지리 등의 과목들이 적혀 있다. 그 아래로 ‘조선어’ 과목이 눈에 띈다. 조선어 성적이 3학년 이후엔 없다. 그제서야 ‘아! 아버지 때 국어는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였지 싶다.

이걸로 보면 일본이 세계 2차 대전에 개입해 대동아전쟁(아시아 침략전쟁)을 시작한 1941년부터 일본의 우리말 말살정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됐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때 “학교에서 우리말을 못 쓰게 했으며, 쓰면 무척이나 혼났다”고 아버지는 전한다.

다른 학년 출석일이 240여일 이었던데 비해 3학년 출석일이 25일에 그친 걸 보면 아버지의 말씀대로 4학년부터 학교를 열심히 다녔던 게 다시금 확인된다.

 
▲ 아버지의 성적표 뒷면

뒷면에는 성격ㆍ재간ㆍ악병ㆍ취미 등 성행개평(性行槪評)과 신체 발달, 가정 환경란 등이 자리한다. 요즘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과거 성적표일 뿐이다.

이렇게 굳이 아버지의 성적표를 들춰 내 글을 쓰는 건 우리네 성적표 변천사를 쓰려는 건 아니다. 아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곳에는 아버지 당신 삶의 일부분이었던 유년의 추억과 아픔, 우리네 슬픈 역사,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우리네 과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신은 초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17세의 나이에 동급생들과 함께 대동아전쟁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일본 시모노세키행 여객선을 타야했다.

 
▲ 아버지께서 어렵사리 찾은 증거
아버지의 추억을 앗아간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그것은 바로 가정 환경란 맨 밑에 빨갛게 ‘증거’라고 쓰여진 부분에 역사처럼 존치되어 있다. 이게 아버지께서 아들이 앉자마자 성적표를 내미신 이유이다.

아버진 이 증거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다니셨지만 허사였다. 초등학교 성적표에서 어렵사리 찾은 증거를 자식에게 내미시면서 당신은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을 내게 숙제로 내리신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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