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지역의 육지동굴
여수지역의 육지동굴
  • 남해안신문
  • 승인 2006.08.2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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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의 두번째이야기]
율촌의 수암산 자락에 있는 투구봉 정상부근에는 태봉굴이라고 전해지는 동굴이 있다.

깊지 않은 동굴 속에는 십 수 명이 비를 피할 정도의 작은 규모지만 임진란을 승리로 이끈 여수지역의 의병들이 결사항전을 했던 곳으로 전해오는 동굴이다. 동굴 위쪽 산 정상 투구봉은 신성포 왜성에 주둔하던 소서행장 휘하의 왜군들과 맞서 싸워 승리했다는 죽암산성터이다.

태봉굴에서 가까운 소라면 봉두리의 금대마을 서쪽 계곡에는 금대굴이라는 동굴이 있다. 마을에 솟대와 같은 의미인 짐대가 서 있어서 마을 이름을 짐대라고 하고 한자로 금대(金帶)라 하여 유래된 땅이름이며 동굴의 입구는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크기지만 안쪽이 넓게 되어있어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다.

주변이 나무와 돌들로 둘러 쌓여있어 은신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까닭에 임진왜란이나 동학과 같은 난리에 이곳으로 피난하여 살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져왔다.

여수의 가슴 아픈 역사인 여순사건 시에는 소라면의 좌익거물이었던 김생연이 이 동굴에 사람을 모아놓고 사상교육을 했다고 전해졌다.

여순사건의 이야기에는 삼일의 신덕동의 형배굴이라는 동굴도 전해오는데 마을의 청년이었던 김형배라는 사람이 이 굴에서 몇 개월을 숨어 지내다 발각되어 총살당하는 사건이 있던 뒤에 동굴 이름을 형배굴이라고 불러왔다 한다.

문헌으로 알려진 동굴로는 둔덕동의 호랑산성과 고락산에 있는 동굴로 두 곳 모두 산 정상 부근에 장정 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동굴이 있다고 고서에 전해지는데 지금은 정확한 굴의 입구를 알지 못한다.

필자도 수년 전 마을 주민 중에 어려서부터 여러 번 굴을 드나들었다는 분을 만나 굴 입구를 찾았지만 실패하였다.

돌산의 굴전 마을은 마을 앞에 동굴이 있어서 ‘굴 앞’이라고 하던 것을 한자화하여 마을 이름을‘굴전’ 이라 하였다. 이 동굴에도 난리를 피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큰 바위와 바위가 걸쳐서 만들어진 동굴 안은 최근에도 사람이 기거했던 흔적들이 널려있다.

무슬목 남쪽에 있는 대미산에는 비교적 성의 원형이 잘 남아있는 달암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산성 북쪽 기슭으로 돌아보면 크고 깊은 동굴이 자리 잡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동굴 외에도 달암산성에는 많은 동굴이 산성 지하에 자리하고 있어서 산성 위에서 땅을 쿵쿵거리면 동굴의 빈 공간? 때문에 땅이 울린다고 하여 열심히 뛰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화양면 창무리의 비봉산 중턱에는 <베틀굴>이라는 동굴이 있다. 산중턱 폭포사이 절벽에 위치한 작은 폭포이지만 폭포수 사이로 동굴이 있어 퍽 이채롭다.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임진왜란시 이 동굴로 피한 사람들이 이 동굴에서 베를 짜서 베틀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부근에 있던 용문사 암자의 수도승이 수도를 위해서 인공으로 만든 동굴이라는 전설도 전해온다.

쌍둥이 마을로 유명한 소라면 현천리 뒷산 정상에도 두 개의 동굴이 있다. 하나의 굴의 이름을 <베틀굴>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한 집안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베를 짰기 때문이란다.

또 하나의 굴은 <쌀 굴>이라고 하는데, 전설이 재미있다. 이 <쌀 굴> 은 주변에 있던 암자에서 하루 한 번씩 구멍을 찌르면 하루분의 쌀이 나오던 신기한 굴로서 하루에 한 번씩만 찔러야 하는 계율이 전해져왔었다.

어느 날 게으른 상좌승이 있어 하루에 여러분 굴을 찌르자 다시는 쌀도 나오지 않게 되고 계율을 어긴 상좌는 메뚜기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순천 상사의 사시기 마을에도 전해지는데 우리나라 여러 곳에 비슷한 <쌀 굴>의 전설이 많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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