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함이 있는 땅을 보완해 좋은 땅으로 만든다
결함이 있는 땅을 보완해 좋은 땅으로 만든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06.08.1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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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수의 풍수기행 1 ] 한국 자생풍수의 길을 연 도선국사 1
   
▲ 도선국사가 말년 30년을 보낸 광양 백운산 옥룡사터.

도선국사는 TV드라마 ‘왕건’ 방영이후 일반사람들에게 알려진 약간은 ‘신비의 인물’이다. 그는 왕건의 아버지에게 미리 풍수적인 조언을 하여 고려를 세울 수 있는 인물을 태어나게 했다.

당시의 극심한 사회혼란을 마감시키고 우리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한 고승이자 한국풍수지리의 鼻祖(비조)이다.

그는 통일신라 말 덕흥왕 2년(827년)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아래에서 태어났지만 말년 30여년은 여수에서 가까운 광양 백운산 옥룡사에서 보냈다.

풍수학계에서는 비기, 답산가 등을 남긴 옥룡자(玉龍子)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한국 자생풍수의 출발젼이다. 이는 중국에서 전래된 풍수이론이 아니라 한국에서 만들어낸 독특한 풍수이론이기 때문이다.

비보풍수 만들어낸 ‘한국자생풍수’ 비조

다시 말하면 단순히 좋은 땅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결함이 있는 곳을 보완하여 좋은 땅으로 만들어 쓴다는 ‘눈이 확 뜨이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를 비보풍수라고 한다. 허점이 있는 땅을 보완하여 이롭게 바꾸어 쓸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발상인가.

대부분의 풍수지리 이론서가 중국에 그 뿌리를 둔 것들이 많지만 그 안엔 흠이 있는 땅을 고쳐 쓴다는 내용은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만의 독보적인 이론을 만든 셈이다.

쉽게 말하면 허전한 곳에 인공적인 산이나 제방, 사탑을 세워 좋은 기운을 감돌게 하는 것이다. 흩어진 기운을 한데 모아 인물을 태어나게 하고 나라의 운까지 회복시키는 남다른 풍수이론을 정립한 것이다.

어지러운 사회 풍수로 서민어려움 풀어

그가 태어난 통일신라 말기는 중앙정부의 통제가 되지 않아 전국이 무정부상태와 같은 혼란스러운 때였다. 곳곳에서 지방호족들이 독자세력을 키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국민들만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빨리 나라가 통일되어 국민들이 편안히 살 수 있기를 기원했다. 그는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국운을 회복시키고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했다. 그는 전국을 답사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한편 결함이 있는 땅은 사찰을 세우거나 탑을 세움으로써 평화로운 토대를 만들어갔다.

대표적인 예가 다음과 같은 ‘왕건출생’ 일화이다.
도선 국사가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송악 근처를 지날 때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이 새로 집을 짓는 것을 보았다. 그는 " 느릎나무를 심을 땅에 왜 마(麻, 삼베)를 심었을까"라고 말하면서 왕륭에게 자문을 하게 된다.

도선은 뒷산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는 천문(天文)을 보고 아래로는 시수(時數)를 살핀 다음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시오. 송악산이 험한 바위로 되어 있으니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보이지 않게 하면 천지의 대수가 부응하여 명년에는 반드시 신성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고 하십시요."라고 일러주고 떠난다.

왕건 아버지가 도선이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짓고 살았더니 그 달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보였고 1년 후 왕건이 태어났으며 그는 성장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왕건이 918년에 태어나 943년에 죽었기 때문에 도선(827년-898년)하고는 시대가 맞지 않는다는 점도 있지만 조언을 해준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는 도선이 명당을 점지 해주어 그 발복으로 고려가 삼한 통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여론몰이로 볼 수도 있지만 그의 풍수 안목과 전해오는 이야기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행주형 한국, 금강 월출산 배의 앞뒤로 생각

   
▲ 도선국사 영정
도선은 우리나라의 지형을 행주형(行舟形, 항해하는 배)으로 보았다. 태백산 금강산을 그 머리로 보고, 월출산, 영주산을 배의 꼬리로 보았다. 부안의 변산은 배의 방향을 잡는 키가 되고 지리산은 배의 노이며 화순의 운주산을 선복(船腹 , 배의 중앙부분)으로 보았다.

이렇게 볼 때 배가 안전하게 나아가려면 배의 머리와 꼬리 등과 배를 눌러 주어야 한다. 특히 배 중심에 묵직한 물건이 있어야 선체가 흔들리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안정을 찾을 수 있지 않는가. 이에 그는 배 중심에 해당되는 운주산(전남 화순군 도암면) 아래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설치하여 배를 묵직하게 만들었다.

또 금강산과 월출산에는 탑을 건조하여 평화로운 기운이 머물게 했다. 이 두 산이 배의 머리와 꼬리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암 월출산을 소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산의 흐름 역행하는 곳 순하게 돌려

그는 산천 흐름에 역행하는 곳엔 사탑과 불상을 세워 순하게 흐르게 하였다. 도선은 지팡이를 짚고 천리 길을 돌며 팔도강산 땅의 흐름을 순리대로 만든 것이다. 그의 위대함은 개인이 아닌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로서 비보풍수사상(裨補風水思想)을 내세운 점에 있다.

도선은 국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절을 둘만한 곳은 절을 세웠고, 절을 둘 만한 곳이 아니면 부도(부처)를 세우고, 탑을 세울 곳이 아니면 불상을 세우고, 결함이 있는 곳을 보충하고, 비뚤어진 곳은 바로 세웠다.

또 월출산 천왕봉 아래에 보제단(普濟壇)을 설치해 매년 5월 5일에 제사를 지내 복을 기도하고 재앙을 물리쳤다.

이렇게 공을 들인 결과 그 후 조선의 지리에는 변화가 나타나 산의 흐름이 아름답게 되고 지맥이 꿈틀거리는 곳이 변하여 나라가 부(富)해졌다는 것이다.

고려가 삼한을 통일한 것도, 조선조가 북방을 개척해서 육진(六鎭)을 설치 영토를 확장하는 등 국운이 발전한 것도 이 도선의 진호(鎭護)의 힘에 연유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것이 중국에서 수입된 풍수와 다른 한국의 자생 풍수다. 도선국사에 대한 생애를 기록한 것은 그의 출생지인 영암 월출산에 있는 도갑사와 말년을 보낸 광양 옥룡사에 남아있다. 그 내용 소개는 다음호로 넘긴다.

필자 약력
·동아일보 전 조사부장
·세계일보 전 편집부국장
·호남매일 전 편집국장 겸 주필
·전 한국편집기자협회 회장
·한국전통지리학회 고문

·호남매일 일요서울 충남신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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