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62] 경호동
[박종길의 땅이야기62] 경호동
  • 박태환 기자
  • 승인 2005.12.03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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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동 남쪽으로 500 m 지점에 위치한 섬마을 경호동은 국동의 어항단지에서 배를 타고 건널 수가 있다. 여수의 향토지를 살펴보면 ‘섬 전체가 고래모양으로 생겨서 <고래섬>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옮겨서 경도(京島)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경호동의 땅이름이 시대별로 변천된 내용을 살펴보면 섬의 모양에서 유래되기 보다는, 섬 주변에 고래가 많이 살아서 지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1530년의 동국여지승람에서 경도는 고래섬인 경도(鯨島)로 나타나지만 1789년의 호구총수에선 경도(京島)로 표기되다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경도(鏡島)로 표기되고 있다.

경도(京島)는 서울에서 귀양 왔다는 왕비의 전설에 영향을 받았으며, 경도(鏡島)는 돌산군이 신설되면서 경도 주변의 바다가 거울같이 잔잔하다 하여 경호면(鏡湖面)이라 명명한데서 비롯되었다.

이와 함께 고래가 많이 살았던 곳을 이르는 이름, <고라짐>이나 <고래기미>, <시우개-시우는 고래의 일종> 등의 이름이 남면이나 삼산면, 화정면의 섬 지역의 여러 곳에 이름이 전하고 있으며 <큰 고래섬>과 <작은 고래섬>, 장군도의 옛 이름인 참경대(斬鯨臺)란 섬의 이름도 고래를 잡은 곳이란 뜻인 것으로 보아서 경도는 고래가 많이 살았던 섬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래로부터 이어지는 먹이사슬을 상상하면 풍부한 어족자원으로 가득 찼던 경도부근 가막만의 자연환경이 상상이 된다.

경호동에는 <오복>마을과 안몰 <내동>, 바깥몰 <외동>마을이 큰 섬인 대경도에 있으며 작은 섬에는 <소경도>마을이 있다. 대경도의 오복마을은 본래는 오봉(五鳳)이라 하였던 곳을 오복(五福)으로 고친 마을로 구봉산의 아홉 마리 새 중에 다섯 마리가 이 마을로 내려와서 오봉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다섯 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마을 뒷산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으로 보인다.

안골 마을 내동과 오복마을 사이의 마을 뒷산을 <성산>으로 부른다. 성산에는 허물어진 긴 성터와 집터가 전설도 함께 전해 온다.

고려 말, 이름을 알 수 없는 고려의 왕비가 임금 앞에서 방귀를 뀌었다. 이를 괘씸히 여긴 왕은 왕비를 귀양을 보냈는데 왕의 분노가 너무 커서 돌이킬 수 없었다. 경도로 귀양을 내려온 왕비의 배에는 왕의 유복자가 자라고 있어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도의 오복마을에는 여 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유복자로 낳은 왕자의 후손들이라고 전해왔다.
경도 역시 고인돌 왕국 여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인돌이 성산을 비롯한 여러 곳에 전해지며 조개더미도 여러 곳에 전해오고 있다.

내동 마을에는 지금도 마을의 당제를 성대히 모시고 있는데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이어지는 당제답게 신비한 전설이 전해온다. 경호동의 입구에 있는 마을인 바깥몰 외동에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마을의 기운이 약하여 쌓았다는 조산이 전해 오며 이 마을에선 매년 <참장어 요리축제>가 열려 장어요리의 참 맛을 전국에 알리고 있다.

여수에서는 처음으로 신식 유흥가가 세워졌던 풀무 모양의 <불무섬>은 일제의 종말과 함께 그 흔적이 사라졌다가 최근 조선소가 만들어지면서 다시 사람이 살고 있다.

두 갈래로 갈라져서 <가쟁이 섬>이라고 불리는 <가장도>는 1960년도에 한 어머니가 딸에 대한 지극한 모정으로 이 섬에서 시내까지 노를 저어 공부를 시켜 성공시킨 일화가 알려지면서 모정의 뱃길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여수팔경 중 <원포귀범(遠浦歸帆)>이라 하여 남쪽 수평선이 보이는 곳까지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돌아오던 돛단배가 아름다웠다는 경호동의 바다는 오늘도 너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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