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열강이 먼저 알아챈 ‘보물창고’
서구열강이 먼저 알아챈 ‘보물창고’
  • 강성훈 기자
  • 승인 2005.10.28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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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신비, 섬을 찾아서 <기획취재 2> 거문도 1
   
▲ 거문도의 상징은 거문도등대. 100년을 맞아 현대식으로 탈바꿈하면서 옛 것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문명의 역사는 물길을 따라서 일어났으며 전파됐다. 인류의 역사에서 바다를 통한 문명의 전파는 육지를 따라 전파되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왔다.

동방문명의 시발 또한 시베리아(쳔산)로부터 일본으로 전파된 경로점에서 서남해도서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남해의 중심점에 위치한 거문도는 일본열도와 중국의 교류 및 문화전파의 중심점에 있었다.

이런 교류의 지정학적 중심점은 군사학적으로도 중요지점으로 확인된다.
거문도사건으로 잘 알려진 영국군의 불법 점령사건과 손죽도에서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전적,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의 전적 등에서도 확연히 그 역사성을 읽을 수 있다.

거문도라 부르게 된 것은 1880년대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이에 대한 영국의 저지로 긴장감이 고조되던 때였다.

러시아가 해양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부동항의 획득이 절실하게 요구되었고 그 대상 지역이 조선이었다. 1860년대 러시아는 영흥만, 제주도, 거문도 등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1854년 푸차친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에 무단 입항하여 11일간 머물다 철수하자 이를 막기 위해 영국이 1885년(고종 22) 4월 15일 영국의 동양 함대 도웰 장군이 3척의 군함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게 된다.

조선 정부는 영국 부영사와 주청 영국 대리 공사에게 항의하였으며, 참판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교섭케하는 한편 러시아도 청나라에 조정을 의뢰하게 된다.

청나라의 리홍장(李鴻章)은 러시아가 조선의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고, 주청 영국 공사를 통하여 영국도 거문도에서 철수할 것을 교섭하여 2년여 만인 1887년(고종 24) 2월 27일 영국군이 철수하게 된다.
이 거문도 사건을 계기로 영국은 거문도를 포트 하밀톤이라 명명한다.

영국군 점령, 근대문물 수용 계기

영국군은 2년여간의 점령기간 동안 다양한 서양문물을 거문도에 전파하게 되다. 점령기간동안 거문도 주민들을 인부로 고용해 댓가를 지불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물건을 전하는 것이 계기가 된다.

또한 주둔군 기지공사에 2천여명의 주민들 가운데 3백여명이 일당을 받고 고용돼 작업에 참여하면서 상호 잦은 교류가 이뤄졌다.

아직도 영군군의 묘지가 보존되고 있는 것도 이런 역사에서 그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은 나쁜 의미보다는 지역의 새로운 문물을 보급한 좋은 점에서 그 의미를 찾지요”라는 한 주민의 말처럼 거문도 사건의 역사는 본토보다 앞선 문명 발달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지금도 인근 주민들이 거문도에서 사망했던 영국군 묘지를 돌보고 있다. 주한 영국대사관에서는 대사가 바뀔때마다 이곳을 방문해 영국군의 묘지를 참배하고 주민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국내 첫 전기가 들어왔던 역사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것이 고종 24년인 1887년 경복궁에 처음 밝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거문도에는 이보다 앞선 1885년 영국해군이 거문도를 점령하였을 당시 이미 전기불을 볼 수 있었다. 해군군함의 초대로 접한 것이었지만 근대문물을 최초로 경험한 역사를 지닌 곳이 바로 거문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기와 함께 거문도가 우리나라 근대문물의 발원지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국제 전신전화였다. 국제전신전화가 첫 개설된 것은 1884년 2월 일본에서 부산국설 해저전선을 설치하면서부터다.

거문도는 이듬해인 1885년 영국군에 의해 거문도와 상해를 연결하는 해저 전선을 놓음으로써 국내 두 번째로 국제 전신 전화를 설치하는 지역이 된다.

이 전화는 영국군이 철수하면서 철폐되었다가 1904년 1월 일본의 사세보와 거문도, 중국 대련 사이에 해전 전선이 부설되고 같은해 9월에는 사세보-거문도-철원반도 사이에 4천여km의 해전 전선이 소통된다. 12월에는 거문도와 제주도를 연결함으로써 통신망의 요충지가 된다.

1백년 역사 등대, 개발논리에 가물가물

전기 보급과 함께 1905년 4월 일본가의 항해와 일본 어민들의 항해를 돕기 위해 당시 국내 최대의 등대를 거문도 서도 수월산에 설치했고, 1938년에는 하백도에 등대가 설치되었다.

덕촌리 산 1번지에 설치된 거문도 등대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국제적 규모의 등대로 일제가 국제적 항로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간주하고 가덕도등대 설치와 더불어 거문도 등대를 시설하였다. 특히 프랑스제 프리즘 렌즈 불빛의 거리는 40km 무적신호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출렁출렁 파도는 삼산을 울리고 남쪽에는 희미한 제주 한라산 동백꽃이 만발 수월산..”으로 시작하는 거문도등대가가 있을 정도다.

1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거문도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각광 받아 왔지만 최근 개발의 대세에 밀려 과거의 역사를 껴안고 있을 등대에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개발논리에 대해서 최근 여러 가지 논란을 낳기도 했다. 한층 현대적 모습을 갖춘 등대가 자리하고 있지만 인근 주민들은 예전보다 못하다는 반응들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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