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
나의 살던 고향
  • 박태환 기자
  • 승인 2004.12.06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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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윤호 원장<재경여수향우 서울 강서구 성모의원>
지난 달 9일 '남해안신문'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재경향우임을 밝힌 이 편지에는 앞으로 '남해안신문'이 나아가야 할 한 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에 본지는 편지 전문을 공개합니다. <편집자주>

새벽 북소리가 잠을 깨우고 구봉산이 남해의 수 많은 다도해를 고즈넉히 품에 안고 물이 유별나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 동백섬의 붉은 꽃망울이 아름답고 장군도의 벚꽃이 너무 화사한 한국의 나폴리 - 여수항.
그 곳이 나의 고향 여수항이다.

내가 다니던 모교는 굴봉산(구봉산) 밑 반반따에(땅) 그 이름도 드높다. 여수서초등학교(42회) 바다 바람 등에 지고 6년의 등하교 개구쟁이들의 대행진이기도 했다.

봉산리 놋깡에서 스케팅과 얼음 썰매를 배우며 국동 조개껍질의 학교 서중 3년을 나름대로 추억에 얽히며 신월리 바다를 처음으로 배우는 길이기도 했다.

오동도의 방파제를 뒤에 두고 상행선 열차는 만성리 굴속에 석별의 눈물을 묻고 고향을 떠난 지 몇 몇 해였던가?

청운의 꿈을 불사르며 30년의 긴 침묵 속에서도 꿈엔들 잊었으랴.
내 고향 잔잔한 바다를...

백발이 희끗하고 잔주름은 무상한 세월을 셈하게 되었을 때 해풍을 실은 한 장의 신문이 나의 눈앞에 당도하였으니 '남해안신문'!
잔잔한 감동이 고향 바다의 파도처럼 조용히 내 가슴을 일렁이게 하였다.

엄청난 어려움과 난관 속에서도 이 신문을 발간해 오신 '남해안신문' 관계자 및 임원님들의 뜻이 소리 없이 전달되는 듯하여 난 진솔한 마음으로 장을 넘겨 정독을 하였다.
마치 잊혀졌던 옛 애인의 그 간의 고백을 읽듯이...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설고 눈선 타향살이를 해온 출향 인사들 중엔 고향에 계신 분들보다 더 고향을 사랑하고 못 잊어 한 분들이 많다.

이런 분들게 고향 소식이 묻혀진 이 신문은 얼마나 큰 위안이 될 줄 모르겠다. 비록 문전옥답이 없어 고향을 지키지 못하고 타향살이 정처 없는 길을 지나온 동안 굳건한 정신력으로 남 못지 않는 성공을 걷으신 분도 있고 고향을 빛내기에 너무도 훌륭한 업적을 크게 남기신 여수인도 적지 않음을 우린 잘 알고 있는 터이다.

이제 '남해안신문'이 이런 출향 출신을 발굴하고 이분들과 대화로 고향을 향한 강한 애정을 도출하는데 힘을 기울여 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남해안신문'이 우리들 서로의 마음을 트이게하고 경향각지(京鄕各地) 향우(鄕友)들의 가교 역할을 다하여 무궁한 우리 고향 여수 발전에 문화적 영향력을 갖는 신문이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바이다.

우리 서울 재경 및 다른 곳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출향인사들이 솔선수범하여 고향사랑, 고향자랑을 하고 자신을 숨기지 아니하고 모든 행사에 참여함으로서 자기의 근거를 확실히 하고 자긍과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리하여 향후 '남해안 관광벨트'가 떠오를 때 대륙의 끝이라고 유배나 보내던 곳이 반도를 이끄는 머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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