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깊이가 얕아 ‘낮은 개’에서 ‘나지개’ ‘나진’으로
바다의 깊이가 얕아 ‘낮은 개’에서 ‘나지개’ ‘나진’으로
  • 남해안신문
  • 승인 2004.11.2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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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야기 24] 화양면 - 나진리

화양면 소재지 마을 나진(羅陣)은 바다의 깊이가 낮아 물이 빠지면 배가 다닐 수 없는 ‘낮은 개’란 뜻의 나지개가 본래의 마을 이름이었다. 호구총수의 기록에서도 나지포(羅之浦)라고 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나지포를 지금의 나진으로 이름을 고쳤다.

1990년대 초에 발행된 마을유래지에서는 비단 같은 아름다운 포구여서 이름 지어졌다 기록하고 있는데 나진(羅陣)의 한자의 뜻을 풀이하여 지어낸 이야기다.

지금의 나진마을은 면소재지로 지정되면서 새로운 마을을 만들면서 큰 마을이 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화양면지역의 중심 마을이던 화동 마을을 면소재지로 지정하려고 하자 감목관의 횡포를 경험하였던 주민의 반대가 많아서 새로운 마을을 세워 면소재지로 하게 되었단다. 곡화목장 시절에 주민이 겪었을 혹정이 짐작되는 이야기다.

나진마을 남쪽의 큰나지개 마을은 나진 마을에서 처음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 곳이다. 마을은 10호도 안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큰나지개라고 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화양면의 장이 들어서게 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처음에는 지금의 농공단지 부근에 처음 장이 섰다가 밀물 때가 아니면 배가 들어올 수 없는 불편함으로 조선 후기에는 큰나지개에 장이 옮겨와서 일제초기까지도 이곳에 장이 섰다고 한다.

차츰 지금의 나진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장터도 옮겨갔지만 큰나지개의 이름은 그대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나진 북동쪽에는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위해 바닷길을 안내하고 표시하는 등대와 항로표식 등을 관리하는 항로표지기지창이 오동도에서 옮겨와 자리하고 있고 이 건물의 뒤편 언덕의 이름은 당머리이다.

지형이 닭의 머리처럼 생겨서 당머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는데 한자로는 계두(鷄頭)라고도 하며 여수의 어항단지 율촌의 여흥리, 화양면 세포 등에서도 같은 모양의 지형에서 이러한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진마을은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루가 있던 곳의 이름도 많은데 나루가 있던 나루꼬지와 조금때 건널수 있는 조금나루의 이름도 전해온다.

마을 안 골짜기는 골짜기마다 재미있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살펴보면 골짜기가 가늘게 이어진 가는골, 밭이 많은 전골, 논이 많아서 논골, 복숭아 밭이 있던 복성밭골, 삵괭이가 살았던 바위 씰가지박골, 피가 많이 자라던 피밭골, 입구가 넓어서 아귀같이 생겼다는 아구창골 등 저마다 지형의 특징을 잡아서 특색있는 이름을 붙여 불러왔다.

나진마을 북동쪽 약 1.2Km 지점에 있는 마을 웅동은 고무골이란 땅이름을 곰(熊)+골 뜻으로 해석하여 곰 웅(熊) 자를 써서 웅동이라 하였다.

그래서 예전에 곰이 많이 살아서 또는 이 마을 주변의 땅의 모양이 곰의 형상을 하여서 고무골 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나 고무골은 움푹 들어간 곳을 뜻하는 구무와 골이 합쳐 이루어진 말로서 지형이 구멍처럼 들어간 곳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최근 마을 입구의 토성너무골 주변으로 16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화양면에는 화동리 일대의 100기가 넘는 고인돌을 비롯해서 화련, 창무, 나진, 서촌, 안포 등지에서 300여기의 많은 고인돌이 전해지고 있어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화양의 역사는 기원전 수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후세들에게는 이 지역에 살았던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전해주고 예사롭지 않은 화양 지역의 커다란 옛 역사의 흔적을 보여 줄 것이라 생각한다.

나진 남쪽 2 KM 지점에 자리한 소장마을은 처음 이 마을에서 살았던 사람이 하씨 성을 가진 사람이어서 ‘하가당’이라 하였다고 전해오지만 하씨는 떠나고 없고 지금부터 240년 전의 기록인 호구총수에서도 소장(小壯)마을로 기록되고 있다.

이 마을 서쪽으로 곡화목장의 장이 들어섰기 때문에 장터와 관련되었던 이름이 아닐까? 우(牛)시장이 있었다면 소장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소장마을의 남동쪽에 있는 해안가 마을인 굴구지 마을은 마을이 해안으로 깊이 들어온 후미진 곳으로 굴(窟)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굴구지라고 한다.

주변 여러 곳의 해변이름이 주변의 형상이나 특징 때문에 이름 지어진 곳이 많은데 찬샘이 있는 참삿기미, 고기잡는 발통모양의 해변 발통기미, 배가 닿는 선창이 있는 선창기미, 가장골이 있는 가장기미, 조개가 많이 잡혀서 조개(등)기미 등의 이름이 전해온다. 이런 해안지명들은 기미라는 우리말을 한자로는 쇠 금(金)으로 표기하다 보니 금이 날것이라는 전설이 많이 전해오기도 하여 마을에서도 이러한 곳을 5금 또는 6금이라고 하면서 금이 날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이 밖에도 해안가에서 왜적의 침입을 살펴 봉수대나 주민들에게 소식을 알리던 요망소 망끝은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멸치잡이를 하던 멸치 막이 있던 마을로 마을 가까이에 용이 승천한 전설이 있는 용굴이 전해오며 이 용굴에서 불을 피우면 굴 앞쪽 바다에 있는 장재도라는 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단다.

또 이 섬은 도독골이라는 가까운 골짜기에 전해오는 임진왜란과 진린제독의 이야기 중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대나무 배를 태워 대나무가 불타면서 나는 폭발음으로 왜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의 무대이기도 하다.?

소장마을과 화동리 사이에는 조선시대 곡화목장 시절 장이 섰던 곳으로 장터로 부르는 들 이름이 전해오며 장터 북쪽으로 10 여호의 ‘안골’마을이 있다. 2002년 경지정리를 하던 중에 마을 앞 들에서 발견된 고인돌 유적에서는 60여기의 다양한 형태의 무덤방이 발견되어 석검을 비롯한 다양한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문화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유적지화 하기위해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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