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장인 1]디지털시대 맞선 양복장이 한상근씨
[여수의 장인 1]디지털시대 맞선 양복장이 한상근씨
  • 남해안신문
  • 승인 2004.05.1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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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대 양복 르네상스 이끈 여수 '천광사' 출신
수선점통해 명맥 유지 고급양복점 개설 희망
오바로크(바지단을 치는 일), 아이롱(다름질), 이샤꾸(자),나마꾸(곡자),누비야(골무).
생소한 이 일본말들은 양복장이들이 즐겨쓰는 용어다. 해방을 전후로 일본일로부터 양복 기술을 배운 한국인 기술자들이 입에 익어 사용했던 이 말들이 지금은 기성복에 밀려 소수 장인들의 독백으로 전해져 오고 있을 뿐이다.

여수에서는 1975년 8월 허봉용 밀수사건이 터졌던 전후로 양복이 르네상스를 누렸다. 그 부흥기를 이끌었던 양복점은 구 여수 오거리의 ‘천광사’와 ‘금화사’였다. 지금은 여수 충무동의 로얄양복점이 그 명맥을 고스란이 이어오고 있을 뿐 장인들은 하나둘 전업을 하거나 수선점을 통해 옛 기술의 향수를 전해주고 있다.

여수시 신기동 갤럭시 상가 인근의 ‘천광사’라는 수선점을 운영하는 한상근(54)씨. 그는 ‘먹고 살기위해 ’ 기술을 배워야 했던 시절, 16살 때 ‘천광사’에 들어가 40년 가까이 천을 만지며 살고 있다. 70,80년대 여수의 기관장들 가운데 한씨의 양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씨의 양복 기술은 뛰어났다.

한씨는 국내 양복 기술자의 대가로 알려진 고 이성우씨로부터 직접 재단과 재봉 기술을 익힌 양복 장인이였다.

70년대 초 천광사는 지금은 고인이된 여수제일교회 박종운 장로가 운영했던 곳으로 직원 수만 해도 40여 명에 이른 기업형이였다. 한번에 열명이 넘는 손님들이 찾아와 양복을 맞추고 가봉을 했던 시절이였던 것에 비하면 놀랄일이 아니다.

한씨는 “진짜 그때는 여수에 돈이 넘쳤다. 특히 바다사람들이 쓰는 돈이 굉장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한씨가 양복 기술자가 되기까지는 기술자 심부름 생활을 도맡아 했던 ‘꼬마’ 생활을 10여 년 가까이 해야 했다. 단추를 달고, 바느 질을 하고 다름질을 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바지 재봉 기술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는 공장장이 상의를 맡길 때 비로소 양복 기술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씨는 지금도 처음 상의를 맡아 재봉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80년대 초 양복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천광사를 인수한 한씨는 IMF때까지 양복점을 운영해왔다. 한씨는 지금도 수작업을 통해 만드는 양복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양복은 하나의 작품으로 예술이다는 한씨는 “돈을 떠나 손님이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만족할 때 하나의 작품을 해냈다는 그 맛에 양복을 만들었던 것 같다”며 굳어버린 손을 내보였다.

한씨가 현재 운영하고 있는 수선점도 입소문을 통해 옷을 아는 손님들로 북적댄다. 한시도 바느질을 놓을 수 없지만 양장 기술자인 아내 김희자(53)씨의 보조가 아니면 견뎌낼 수 없다고 한다. 장인의 기술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천광사를 찾으면 될 것 같다.

이들 부부가 말하는 수작업 양복에 대한 철학은 확실하다. “옷이 잘 흐트러지지 않고 자글자글한다”는 것.

수선점으로 자리를 옮긴 후 양복을 만들지 않아 손이 굳어버렸다는 한씨는 끝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급 양복점을 통해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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