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세계를 경험해 내는 정서적 통찰
숨겨진 세계를 경험해 내는 정서적 통찰
  • 남해안신문
  • 승인 2023.03.10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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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82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시인에게 시가 어떻게 올까?’

시를 감상하고 난 후면 늘 자연스레 남는 질문이다.

그리고 ‘과정, 맥락, 통찰’이란 키워드가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오브랩되면서 세계의 이면을 헤아리고 숨겨진 다른 세계를 경험해내는 통찰의 매력에 빠져든다. 통찰은 예리한 관찰로 동서고금을 관통할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과 혜안을 보여주는 융합과 통섭의 길이다. 세계를 피상적으로 아는 인지적 통찰을 넘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정서적 통찰과 자유롭게 크로스오버 한다.

그것으로 존재의 본질을 캐물으며 끝내는 내 안에서 나를 만난다.

그것으로 언어를 가로질러 새로운 나에게도 건너가고, 더 우월한 존재인 스스로를 향해 자유롭게 비행을 한다. 그래서 시인이 만난 한 줄의 시는 시인으로 하여금 그 다음으로 끌고 가는 슬기로운 힘이 되고, 새로운 통찰로 나아가는 공손한 설득이 된다.

시인에게 존재하는 하나는 결국 하나가 아니라, 어떤 세계와도 소통하고 관계할 수 있는 여럿이다.

시간과 공간에 따른 탐색으로 하나의 존재가 여럿의 본질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Who am I?

Where am I from?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은 스스로 존재의 본질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색한다. 인간이 창조한 모든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결과물로 어디에서 어떻게 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존재자, 즉 현존재라고 말한다. 존재에 대한 탐구는 곧 인간에 대한 탐구라 단정하고 있다. 박혜연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은 것,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상상을 펼쳐 정중하고 격식 있게 존재의미를 풀어내려 한다. 대상과 현상의 본질을 훔쳐 자존을 세우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의미와 가치를 드러내려 몰입한다.

그러므로 시 속에 스스로를 용해하여 넌지시 던져놓을 수밖에 없다.

시인에게 시는 그 자체로 자존이 된다.

진심으로 자신을 만나기 위한 함축적 질문과 함께 실존의 처음을 궁금해 하고, 자신만의 개성적 어법으로 세계의 본질을 하나하나 밝혀낸다. 작정하고 자신의 어법으로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철학적 메시지도 그렇지만 인문학적 따뜻함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樂之者 不如創之者

논어의 이야기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고, 즐기는 사람은 창의력을 가진 사람만 못하다고 했다. 그는 시의 곁에서 늘 즐겁고 행복하다. 독서의 힘에서 연유된 다양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은 무한대로 확장되며,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상상의 지평에 서게 한다. 별 볼 일 없는 풍경, 그것을 주목하는 어떤 힘에 의해 늘 부대끼는 풍경이 새롭게 읽혀진다,

시인에게 시는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는 수행이면서, 자신의 성숙시켜가는 성찰이다.

우리가 왜 사유하며 살아야하는지를, 왜 내 안에 저장된 경험과 기억을 만나며 살아야하는지를 알게 된다.

시는 인풋in-put도 아니고, 아웃풋out-put도 아니고 노풋no-put 상태로 세계를 만나고 가만히 자신이 서있는 삶의 자리를 살피는 일이다.

몰입의 통찰이다.

이럴 때 고요의 깊이를 갖는다는 것, 그 한 줄의 깊이인 고요의 동학動學을 깨닫는다는 것은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추스림이다. 고요의 동학은 고요 속 생산 활동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운동하는 활동이다. 꽃이 피고 지고, 열매가 맺고,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하는 지상의 모든 풍경과 현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법칙이 있다. 무심히 지나쳤을 현상이나 사물을 자신의 안목을 앞세워 숨겨진 법칙을 찾아내려는 통찰이 창작의 밑자리다.

인지발달심리학자 피아제(Piaget)는 생각의 본질을 ‘표상(representation)’이라 정의한다. ​presentation, 즉 ‘반복적으로 보여주다’의 의미로 ‘다시 보여주다’라는 뜻이다. ​어디서 본적이 있었던 것을 그림처럼 머릿속에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다.

그래서 시의 어법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상적인 평범한 화법으로 세상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고, 잠자는 세상의 감성을 깨워 우리에게 전한다. 그렇다고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 본적이 있던 것을 머릿속에 다시 한 번 떠 올려 상기시키는 화법이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지식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재편집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은 그림인가?, 아니면 문장인가? 하는 질문은 심리학의 아주 오랜 관심이 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 날, 수많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던 그 눈이 /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검고 푸르스름한 빛들이 겹겹이 층을 이룬 눈 /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 검고 푸른 빛 너머 / 얼마나 많은 별들이 넘실대고 있던지요

별 너머에는 또 / 얼마나 깊고 깊은 말들이 자리하고 있던지요

그날 이후 / 나는 마당 한 켠에 앉아 있는 날 많아졌습니다

문장들이 작은 마당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 박혜연의 <詩>

 

박혜연시인의 관심은 세계의 숨겨진 법칙을 제대로 보고 느껴 발화하는 언어적 횡단에 있다.

눈이 있고 귀가 있다고 보고 듣는 것은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새롭게 만난다. 그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축적된 인문학적 정보를 유추하고 이를 통해 시의 탯자리를 만든다.

마음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생각의 지점에서 다시 질문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만나고 기존의 관습적인 사유 혹은 언어를 낯설게 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것은 이제까지 있었던 것을 다르게 본 결과물, 그만이 만난 세상의 풍경이다.

인간은 대자연의 질서에 동조하고 함께할 때, 자아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시적 발견과 표현을 통해 시인의 실존확인과 자아실현이 가능해진다. 직관보다는 초월적 안목인 통찰을 통해 대상과 현상의 깊이를 들여다보게 된다,

지금의 현상을 넘어 저 너머까지를 바라보는 눈, 사람들과 눈을 맞추던 눈, 검고 푸른 빛 너머 별을 바라보던 눈, 별 너머에 있는 깊고 깊은 말들, 그리고 시 한편을 기준으로 앞부분에 생략된 의미, 행과 행 사이의 함축의미, 그리고 감상 후 남는 여운까지 한편이 갖는 시간적 공간적 상상력으로 확장된다.

그 확장을 위한 장치로 낯익으면서 낯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보이지 않는 너머 까지 헤아리는 그의 서정적 통찰, 나를 지켜보는 검고 푸르스럼한 빛의 눈은 내 안에 있는 심안에 다름 아니다.

그 눈빛으로 세계를 보고 나를 들여다보고, 별 너머에 있는 수많은 별을 본다.

별은 문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사랑이고, 희망이고, 꿈이고, 운명이고, 나아갈 삶의 지표로 원형상징화 된 언어로 자리한다. 박혜연의 별은 그가 만난 또 다른 새로운 세계이며 깊고 깊은 말들이 넘실대는 별 너머의 별, 현재의 나를 넘어 저쪽에 있는 나다. 시적 창조의 의미에 유추된 존재자로서 사색과 성찰을 뜻하면서, 시인에게 다가온 새로운 세계, 낯선 존재로서의 자아다.

‘관찰과 몰입’과 함께 낯익은 것들에 내재하는 낯선 풍경을 드러내는 공감화법으로 객관적 상관물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확장하면서 그것으로 언어의 힘을 얻고,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시적 공감을 견인해 낸다.

시는 마음으로 세상보기다,

시 쓰기는 마음의 눈으로 관찰하고 머릿속으로 형상을 그리며 유추하고 통합적 성찰에 이르는 과정이 된다.

마음을 챙기는 마음 컨설팅임을 알게 된다.

시를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을 통해 시를 쓴다.

 

꽃같이 붉은 심장이 펌프질을 하던 순간부터

모든 그리움 속에 숨어있는 적멸을 예감했을까

붉디붉은 꽃 속에 숨어있는 칠흑의 순간에

한 호흡 한 호흡 내세워 세상을 걸었을까

눈물 콧물 쏟아내던 호스가 길게 몸을 관통해 나오고

나는 얼룩진 얼굴을 닦으며

그리운 영혼들을 새삼 심장 위에 올려

생의 순간에 말을 걸어오던 것들을 지긋이 눌러본다

다행히 그 영혼들이 아직 내 얇은 손바닥을 울리며 뛰고 있다

또다시 낯선 행성에서 잠을 깨겠지만

그때마다 사무치게 창을 두드리겠지만

꽃 같은 내 심장이 두근두근 부르는 그리운 이름이 있어

이 생의 호흡을 다시 가다듬는 것이다 -박혜연 <어떤 이유>

 

살아있는 순간부터 그리움이 시작되고, 모든 그리움 속에는 적멸이 숨어있다. 적멸은 생멸(生滅)이 함께 없어져 무위 적정(無爲寂靜)함, 즉 번뇌의 경계를 떠나 또 다시 낯선 행성에서 잠을 깨는 열반에 들기도 한다.

대상의 자아화를 위한 몰입이다.

몰입은 플로우flow라는 심리학용어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경험이 될 뿐만 아니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시상을 풀어내는 장치가 된다. 이 장치가 남들과 다른 생각이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에너지가 된다.

시인 자신의 능력을 펴고 자존을 확인하는 최적의 상태이자 성장의 과정으로 자리하여 행복하게 사는 밑자리가 된다.

‘꽃 같은 내 심장이 두근두근 부르는 그리운 이름이 있어 이생의 호흡을 다시 가다듬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은 것의 표상인 ‘꽃’에 숨어있는 칠흑의 순간에 말을 걸어오는 내적 독백으로 ‘존재’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시를 쓰며 행복한 끝내 독자들이 행복한 시를 생산하게 되는 원리도 여기에 있다.

그의 상상력은 배가 고파도 죽지 않던 세월 속 내게 수북이 당신을 차려놓은 우주의 눈빛 하나 가만히 만난다는 시적 공감에 닿고 있다.

시인에게 시는 일상에 흘러넘치는 대상과 현상을 상상의 경험으로 견인해내는 힘으로 작용한다.

 

마음 단단히 먹고 덤벼야 하는 세상이라면 아무래도 나는 백전백패 단 한 번의 승리

도 없을 것이다 돌아서면 금방 물렁해지는 마음 안쪽, 나도 작심하고 나를 다 내려놓을 것이다

물렁해지지 않으면 스며들지 못하는 세상, 물컹물컹 건너다보니 한 세월이 다 건너 간다

제 살과 껍질 내려놓은 간장게장 작심이 입맛을 돋우는 물컹한 저녁, 물러지지 않고

는 서로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과 마음,

그렇게 한 세상 저물어도 좋겠다 -박혜연 <작심 게장>

 

시인은 게장백반을 먹으러 가는 길에 우연히 ‘작심 독서실’을 보고 ‘작심作心’이란 어휘에 사로잡혀 상상의 의미망을 편다. 작심은 ‘마음을 단단히 품는다’는 뜻으로 저력, 도전, 승부수, 넷플릭스, 꿈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

시인은 ‘작심 독서실, 작심삼일, 작심한 간장게장, 마음 단단히 먹어야하는 세상, 물렁해지는 마음 안쪽, 간장게장 작심이 입맛을 돋우는 저녁, 물러져야 서로 닿을 수 있는 마음에 이르는 상상을 펼친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오히려 간장게장처럼 마음이 물러져야 서로가 살갑게 닿을 수 있겠다는 역설의 생각으로 한세상이 저물어 가기를 희망한다. 이 시의 기본 베이스가 된 역설은 내가 포기하지 않는 세상은 세상 또한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진리를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시창작은 숨겨진 세계를 경험해내는 정서적 통찰, 설렘에서 설렘으로 만나는 선한 작용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시를 통해 떨림과 울림의 행복한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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