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꽃은 혁명이다
세상의 모든 꽃은 혁명이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23.01.1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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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79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인간은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면서 동경하고 모험하고 도전하고 탐험한다. 늘 저쪽을 궁금해하는 존재 즉, 인간은 항상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존재다.

세상의 모든 창조는 건너가는 일이다.

건너가는 일이 곧 혁명이다.

혁명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가고 싶은 곳,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바라보고 동경하고 모험하고 탐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궁금해 하고 의심하고 뒤적거려보거나 그래도 알 수 없는 것은 질문을 던진다. 꼭 대답을 듣기 위해서 던지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뭔가 새로운 곳으로 다가서기위한 장치로서의 질문이다. 그래서 미래를 여는 시는 대답이 아닌 질문하는 시, 세상의 모든 시는 대답의 결과가 아니라 질문의 결과다.

 

나뭇잎 배 위에 바람 한 올 앉았다

가만히

물소리로 내려 앉아 물소리를 저어간다

가만히

가만히

한 세상 너머 한 세상으로 건너간다 -신병은<가만하다>

 

대답이 멈추는 일이라면 질문은 건너가는 일이라고 했다.

궁극적인 질문은 같아도 대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같은 질문에 대답은 다 다르다는 그것이 창조의 본질이다. 그것은 대답하는 사람마다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과 처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꽃은 어디까지가 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사람에 따라서는 피어서 떨어질 때까지로 보 사람도 있을 것이며, 봄에 잎이 필 때부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떨어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어느 주장이 맞고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어느 관점에 따라 답을 구할 것인가의 문제에 부딪혀왔다.

 

꽃이 지고 나면 그뿐인 시절이 있었다.

꽃이 시들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던 시절

나는 그렇게 무례했다

모란이 지고 나서 꽃 진 자리를 보다가 알았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다섯 개의 씨앗이 솟아오르더니

왕관 모양이 되었다

화중왕花中王이라는 말은

꽃잎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란꽃은 그렇게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었다

백합이 지고 나서 보았다

나팔 모양의 꽃잎이 지고 수술도 말라 떨어지고 나서

암술 하나가 길게 뻗어 달려있다

꽃가루가 씨방에 도달할 때까지

암술 혼자서 긴긴 날을 매달려 꽃의 생을 살고 있었다

꽃은 그러니까 진 다음까지 꽃이다

꽃은 모양과 빛깔과 향기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랑이 그러하지 않다면

어찌 사람과 사랑을 꽃이라 하랴

생도 사랑도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다 -복효근<꽃을 보는 법>

 

관점에 따라 답은 달라지므로 세상의 모든 시는 관점이다.

이점에서 보면 관점도 혁명인 셈이다.

꽃이 피는 것 또한 관점이고 혁명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꽃은 혁명이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움직임이 다 혁명이다.

봄이 오는 것도, 꽃이 피는 것도, 바람이 부는 것도, 비가오고 눈이 내리는 것도 혁명이다. 늘 보던 일출이 다르게 보이는 것도 혁명이다.

존재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억압된 인간존재의 회복을 부르짖는 것도, 사회의 부조리에 당당하게 맞서는 것도 다 혁명이다

혁명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생각의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일이다. 나의 주체성으로 내 삶을 세우는 일이다.

꽃이 피는 것은 꽃이 꽃의 생각으로 사는 일이다. 꽃들이 노랗고 빨갛고 연보랏빛이고 간에 그것은 꽃의 언어, 꽃의 생각이다. 그렇게 피려고 한 의지와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장미꽃은 장미의 생각이고, 해바라기 꽃은 해바라기의 생각이고 채송화는 채송화의 생각이다. 철학적이긴 해도 그만의 생각이 곧 그 존재가 된다.

그 혁명이 때로는 사람의 감정을 정화하고 세상을 구하고 역사를 바로잡기도 한다.

시 한편의 힘이 곧 생각의 힘이면서 혁명의 힘이 된다.

가만히 내 주위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혁명을 들여다보는 일이 시창작이다.

 

한 송이 꽃은 한 송이가 아니었어

이슬 머금은 햇살의 꽃

햇살 머금은 바람의 꽃

어둠 머금은 아침의 꽃

찌릿찌릿한 오르가즘의 꽃

꽃술 사이로

꽃잎 사이로

피어나는 생각의 꽃

가만히 가만히 나를 밀어 넣었어

쿵쿵쿵 심장이 뛰었어

내밀한 호흡으로 관계하지 않는

아무것도 없어

우리 모두 꽃이었어

그래 그래 우리 모두 피는 거였어

꽃송이로

꽃 한 송이가 -신병은<꽃 한 송이가>

 

세상의 모든 시들은 그동안 누구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세상의 처음이고 싶은 것이라면 시 한편 한편이 다 혁명인 셈이다. 시는 표현에 앞서 자기 생각과 소명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창작의 기본은 나의 생각을 펴는 일이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그것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눈길과 생각이 건너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건너는 일은 또 경계를 넘어 관계한다는 뜻이다,

관계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일이다. 그 관계 속에 ‘나’라는 개체를 투영시키는 일이다, 시의 내용이은 ‘어떤 상황의 어떤 대상’에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공감하거나 공명하는 일이라면 다른 존재(세계)와의 상호 보완의 관계일 것이다.

지금을 건너 내일로 가기 위해서는 자기가 갖는 확신이나 이념의 벽을 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그래야만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내면적 풍요를 갖게 된다.

그래서 철학자들도 확신의 안에서 사유하지 말고 확신의 바깥에서 사유하라고 권한다.

경계의 저쪽에 있는 것, 즉 흔들리는 것들이나 불안을 배척하거나 피할 것이 아니라 품어야 할 것들이다.

창조인은 잘 건널 수 있는 사람이다.

잘 건너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회학에 모두 자유로워야 한다.

창작의 깊이와 넓이를 위해서 통섭統攝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단테소나타’를 이해하기 위해 탄테의 신곡에 관한 책은 있는 대로 찾아 읽었다는 피아니스트 임윤찬도 그렇고, 그가 연주할 ‘황량함’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카뮈의 ‘이방인’을 반복해 읽었다는 박재홍, 그들은 연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단순한 연주의 기능만이 아닌 인문학적 해석에 다가가려 노력했다는 일화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창조는 통섭統攝으로 이루어낸 혁명이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5천만 마리다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 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 정현종<한 숟가락 흙 속에>

 

흙의 재발견이면서 세계의 재발견이다.

흙한 숟가락에 안겨있는 1억5천마리 미생물의 자연과학과 흙 한술에 안겨있는 삼천대천세계의 인문과학 그리고 내 삶을 떠받쳐주는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흙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 혁명이다.

거창한 말 같지만 세상의 모든 창조는 혁명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상의 모든 시 또한 생각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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