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리고 말 부림 2
말 그리고 말 부림 2
  • 남해안신문
  • 승인 2022.12.2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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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78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말에 대한 민감성이 시의 힘이라면, 시의 힘은 곧 말의 힘이다.

시어는 누구나 쉽게 알고 많이 사용하는 가장 일상적인 말을 가장 적합한 곳에 찾아 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감의 힘, 공명의 힘이다.

말 부림은 우리가 늘 쓰는 일상적인 말 중에서 지금 내가 표현하려는 것에 딱 맞는 말을 찾는 일이다.

시인은 하루 종일 쓰는 사람이 아니라 하루 종일 뭔가를 찾는 사람이다.

 

바람 한 점 없는데 밤톨 하나 톡 떨어지다

- 머리통을 깨부수어 기억과 생각 죄다 꺼내 청설모 들쥐 까마귀들에게 보시하다-

이제야 밤송이로만 남아 환하게 웃다 - 신병은 <해탈>

 

가을날 산길을 걷다 문득 밤톨 하나 떨어지는 풍경을 통해 ‘해탈’의 관념을 이미지화한 시다.

말 부림은 장면과 상황이 눈에 보이도록 그림을 잘 그리는 일이다.

즉 이미지다.

이미지는 언어의 회화성(그림)이다.

이미지는 관념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이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어둠이 골목 여기저기 빗물처럼 고였다

햇살을 양푼이에 비벼벅는다

나팔꽃이 창틀을 야금야금 기어올라 흘림체로 풀어진다
작설차를 우리는 동안 참새 입술 닮은 잎들이 정담을 나누었나
- 박제천 물의 집

 

이미지는 유추와 비유, 언어의 이종교류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를 ‘느릅나무 껍질처럼’ 직유에 의해 이미지가 분명해지고, ‘어둠이 빗물처럼 고였다’는 이미지를 만든다. ‘작설차를 우리면 참새입술을 닮은 입들이 조잘댄다’는 표현을 보면서 한폭의 정겨운 그림을 그리게 된다.

 

엄마가 마른 미역을 그릇에 담는 모습 지켜 본 뒤에야 알았어.
발등에 물이 닿기만 해도 바다 속에서 살랑살랑 놀던
자신의 푸른 옛 모습, 고스란히 기억 해 내고 풀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마른 줄기 안에 바다를 꼭꼭 숨겨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박성우 <미역>

 

미역을 물에 담구면 파랗게 본래의 색이 살아난다는 것을 담가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바다에서 살랑살랑 놀던 자신의 옛모습을 고스란히 기억해낸다, 미역의 기억법을 이렇게 이미지로 풀어낸다.

이미지는 전달하려는 관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공감화법이자 상상력을 확장하는 장치다.

우리는 요즘 이미지를 생산하고 관리하고 소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국가든 기업이든 사람이든 이미지다. 그리고 삶 자체가 모두 이미지다.

시창작도 대상의 혹은 현상의 이미지화다.

 

엄마가 사과를 깎아요 / 동그란 동그란 길이 생겨요

나는 얼른 그 길로 들어가요
동그란 동그란 길을 가다보니 연분홍 사과꽃이 피었어요
아주 예쁜 꽃이에요 / 조금 더 길을 가다보니 꽃이 지고 열매가 맺혔어요
아주 작은 아기 사과예요 / 해님이 내려와서 아기를 안아 주었어요
가는 비는 살금살금 내려와 아기에게 젖을 물려주었어요
그런데 큰일 났어요 / 조금 더 가다보니 큰바람이 마구마구 사과를 흔들어요
아기 사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어요
조금 더 동그란 길을 가다보니 / 큰바람도 지나고 아기사과도 많이 자랐어요
이제 볼이 붉은 잘 익은 사과가 되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길이 툭, 끊어졌어요

나는 깜짝 놀라 얼른 길에서 뛰어 내렸죠 - 김철순<사과의 길>

 

위의 동시를 보면 사과를 깎는 장면과 그 장면 속에 안겨있는 한편의 동화같은 풍경을 풀어낸다.

아파리보다 연분홍꽃을 피우고 가지마다 해님이 안아주는 동그란 애기사과를 만나는 풍경 속에 시인의 상상력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대상을 읽는 기술은 마음을 읽는 기술이다. 저 나무에게, 풀에게, 꽃에게, 봄에게, 바람에게, 어둠에게, 풀에게, 하늘에게, 바다에게, 새벽이 전해주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듣으면서 그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평소에 다양한 감각을 언어적으로 잘 응용하고 있다.

‘매운 것, 뜨거운 것’도 ‘시원하다’고 표현하고, 봄나물의 맛을 ‘화사하다’고 표현한다.

감각에 의존하는 말이 육감이다.

 

나 손 씻었다.

그 사람 참 따뜻해.

나 그 사람과 가까운 사이야.

더러운 손 치워.

감칠맛이 난다.

 

이러한 언어적 표현이 육감에 해당한다. 그래서 시 창작은 있는 그대로를 오감으로 표현하고, 오감으로 느낀 바를 솔직하게 그려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미지다.

교직에 있을 때 참으로 말썽쟁이 학생이 있었다. 결석을 밥 먹 듯 하고 학우들과 주먹다짐도 밥 먹 듯 하는 문제아였다. 그 당시에는 생활기록부에는 종합 평가란이 있어 학생의 학업과 행동발달상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서술하였다. 재학기간에 하도 말썽을 부려 생각 같아서는 ‘싹수가 뇌리끼리 함’이라고 쓰고 싶었지만 이렇게 적은 기억이 있다.

 

‘학교생활에 건강미가 철철 넘침’

‘철철 넘친다’는 이미지에 기댄 중의적인 화법이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통찰은 곧 화법으로 드러난다.

화법, 말을 잘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림을 그려주듯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뭇가지가 알을 낳았다.

수백의 알이다.

햇살은 알에서 토도독 튀어오른다

사람의 눈길도 모여들어 알을 어루만진다

한눈 판 사이에 일제히 부화해 재재거리는 하얀 새떼

오는 봄 다 불러 모아 일일이 머리에 깃털을 달아주고 있다

나무가 날아오른다 -백우선 <목련>

 

이미지에 의한 언어적 표현이 돋보인다.

목련꽃을 보며 나무의 알, 사람의 눈길이 알을 어루만지고, 한눈 판 사이에 일제히 부화하고, 하얀 새떼, 나무가 날아오른다 등의 등의 이미지가 선명한 시다.

다음 시도 마찬가지다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후다닥 무언가 뛰쳐나간다.

무꽃이다. 까만 봉지 속이 환하다.

비닐봉지에 담긴 묵은 무 한 개 꽃자루를 달고 있다.

봄이 말라붙은 무 꼬랑지를 쥐고 흔들어댄 모양이다.

창을 넘어와 봉다리를 풀고 무를 부추킨 모양이다.

눈을 뜨다 만 무꽃. 여기가 어디라고 덜컥, 꽃이 되었던가.

어미 살을 파먹고 꽃이 된 무꽃. 쪼그라진 젖을 물고 있는 무꽃. -마경덕 <무꽃 피다>

 

비닐봉지 속 무의 노란 꽃대, 후다닥 뛰쳐나간다, 봄이 말라붙은 무 꼬랑지를 쥐고 흔들다, 창을 넘어와 봉다리를 풀고, 덜컥, 꽃이 되었던가 등의 봄날의 작은 풍경을 이처럼 감각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싶다.

이 두 편의 시를 보면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옮겨놓을 수 있을까에 대해, 어떻게 마음의 수혈은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알게 된다.

창작은 ‘이쪽을 통해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이고, ‘감각을 통해 삶의 의미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내면의 눈, 내면의 귀, 내면의 코, 내면의 촉각과 몸의 감각에 의한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재창조한다. 피카소도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어있는 놀라운 속성을 찾아 그리고,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본 것들을 그렸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창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만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다양한 삶의 통로를 지나온 경험들과 일상의 서사가 오브랩 될 때 비로소 시는 빛을 낸다.

 

허리끈을 풀어 놓고 누운 여자

경사가 급하지 않아서

잠시 쉬어 가고 싶은

이봐

하고 툭 치면

나?

하고 돌아눕는

살찐 여자의 누드. -박승미 <모과>

 

모과는 성격 느긋한 살찐 여자의 모습에 기대어 놓고 독자들에게 '어때요, 이 둘 서로 많이 닮지 않았아요?' 하고 묻는다. 독자는 시의 이미지에 기대어 ‘맞아요’하고 응수를 할 것이다.

언어의 묘미는 말의 뉘앙스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의 결, 언어의 영혼인 말맛에 대한 눈과 귀가 있어야 한다.

말맛이 곧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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