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洞察)
통찰(洞察)
  • 남해안신문
  • 승인 2022.12.0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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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76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창작은 예리한 통찰로부터 시작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자유롭게 관통하는 힘인 통찰은 시대적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과 혜안을 보여주는 융합과 통섭의 크로스오버다.

통찰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의 지식을 바르게 연결시켜 주는 폭소노미다.

폭소노미는 folk+order+nomous의 합성어로 '사람들에 의한 분류법'이란 뜻이다. 이는 웹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정보나 관련 주제를 고전적인 분류기반의 디렉토리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키워드(꼬리표)에 따라 구분하는 새로운 분류 체계를 의미한다. 인터넷상에서 사용자들이 작성한 태그로 콘텐츠를 분류하는 일이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관계망으로 짜여있어 폭소노미에 의하면 세상은 통하지 못한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온생명과 낱생명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세계는 하나의 생명체인 온생명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는 하나하나의 낱생명이 된다. 세포에 해당되는 낱생명이 하나하나 모여 온생명을 이룬다고 보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통찰은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일이며,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일이다.

통찰은 인지적 통찰과 정서적 통찰로 이루어져 있다. 인지적 통찰은 자신의 문제를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라면, 정서적 통찰은 자신의 문제를 가슴깊이 ‘깨닫는 것’이다. 바깥만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내재된 시간적 공간적 의미를 헤쳐내는 일이다.

 

한 송이 꽃은 한 송이가 아니었어

이슬 머금은 햇살의 꽃

햇살 머금은 바람의 꽃

어둠 머금은 아침의 꽃

찌릿 찌릿한 오르가즘의 꽃이었어

꽃술 사이로

꽃잎 사이로

가만히 가만히 피어나는 생각의 꽃

쿵쿵쿵 뛰는 심장의 꽃이었어

내밀한 호흡으로 관계하지 않는

아무것도 없어

우리 모두 꽃, 꽃, 꽃이었어 -신병은 <꽃 한 송이>

 

꽃 한 송이가 피기까지의 상황을 분석해보면 햇살도, 바람도, 이슬도, 어둠도, 아침도, 저녁도 다함께 관계한 결과치다. 그래서 꽃 한 송이 속에는 수많은 꽃들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때’란 말의 다른 의미를 생각해보면 ‘피다, 지다, 철들다, 기다리다, 꽃, 잎, 그립다, 나이, 죽다, 떨어지다, 만나다, 헤어지다, 팔다, 사다, 출출하다, 보고 싶다...” 모든 말들이 때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서적 통찰로 바라보면 세계는 결국 하나가 된다.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이다.

그것에서 유추가 가능해지고 은유가 가능해진다.

진화가 낳은 가장 걸작품이 ‘인간’이라 한다. 한결같이 창의적으로 사고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생활의 달인’이다. 그것은 통찰과 유추의 힘에 의해 엄청난 창조를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통찰에 의해 인간은 현재의 자신을 지나 새로운 자아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제대로 된 질문 하나가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한가?’는 곧 ‘그대만의 질문이 있는가?’로 바꾸어 말할 수 있고, 그 질문은 궁극적으로 ‘세계 속의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는가?’가 된다.

폴 고갱의 그림도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하는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질문을 통해 성찰한 인간의 참모습을 형상화하려 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타히티 섬 사람들의 모습으로 바꾸어 그린 작품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타히티에서 그린 그의 첫 번째 작품으로 ‘마리아여, 저는 당신을 경배합니다.’라는 뜻의 이 그림을 보면 존재의 원형적 질문에 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단테의 신곡도 어두운 숲속에서 욕망(표범), 권력(사자), 사악함, 재물욕심(암늑대) 때문에 길을 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 숲을 벗어나려면 다른 길로 가야(회개, 참회)했으며, 이는 생각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단테의 지옥이 별 없는 하늘이라면 신곡의 주제는 ‘너의 별을 따라 가라’라고 가르쳐준다.

김환기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도 마찬가지다. 그의 오만가지 생각을 점, 선, 면, 색 으로 표현하면서 나의 점들이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고 질문한다.

점, 선, 면, 색의 의미는 사유와 수행의 결과다.

그의 존재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서 시작된 그의 예술적 실험들이 오롯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통찰의 시작은 질문이다.

통찰洞察의 통洞은 동네, 동굴의 의미를 갖고 있다. 동굴은 인간의 삶을 시작했던 곳,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발견하는 곳, 질문이 시작된 곳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루어지는 통찰의 공간이다. 이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외롭고 쓸쓸한 공간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여정을 떠날 때 비로소 생긴다.

공간이 생각이다. 동굴이 통찰이다. 깨달음이다.

단군신화의 동굴, 원효의 동굴, 쇼베의 동굴, 무함마드 동굴, 헨리데이빗 소로의 골방, 잡스의 골방...

동굴에서의 깨달음이란 지금까지 쌓았던 세계를 허물어버리는 것, 편견을 깨부수는 작업으로 이는 동굴에서 듣는 침묵의 소리다.

그래서 ‘당신만의 동굴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 은밀한 골방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오이디푸스 신화가 주는 지혜 또한 ‘인간이라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오세영 <원시((遠視)>

 

원시((遠視)의 본질을 궁금해 한 결과다.

본질을 알면 모순이 보인다. 인생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다.

역설은 상반된 것들 중간에 설 때 보인다.

경계에서 그 둘을 바라볼 때 보인다. 모순이 역설이 되는 최초의 순간은 그 경계에 서 보는 것이다.

나는 어디로 치우쳐 있지는 않은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노자는 이러한 지혜를 명明이라 했다. 해와 달이 공존해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유가 있으면 무가 있다. 상반되는 것들은 서로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역설의 운명이다.

역설은 모순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역설은 삶의 총체적 통찰에서 가능하다.

 

고향에서 감자 한 상자를 보내왔다

감자꽃에 앉았던 땡볕도 테이프에 끈적끈적 묻어왔다

호미에 딸려 나온 하지의 낮달과 밭고랑을 지나던 바람도 따라왔다

끼니마다 밥상에 고향의 안부가 올라왔다

어느날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몇 개 남은 감자들이 허공을 향해 하얀 발을 뻗고 있었다

먼저 나가려고 발들이 서로 엉켰다

흙이 그리운 감자들을 화분에 묻어주었다 -김우진<보랏빛 그 꽃일 사이>

 

통찰은 자연에서 인문학을 찾고, 자연과학에서 인문과학을 찾는 일이다.

자연과학적 시선과 인문학적 시선의 통섭이다. 자연을 탐색하는 일은 인간을 사색하는 일이면서 삶의 통합적 이해다.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뉴턴, 데카르트, 스노우 등 자연과학자이면서 인문학자였다.

늘 미래만 말하는 과학과 늘 과거만 이야기하는 인문학이 통하지 않고서는 문화가 될 수 없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 통섭하고 융합되어야 문화가 된다.

삶 중심의 인문학적 시선과 앎 중심의 자연과학적 시선, 자연과 인간의 통합적 이해가 될 때 창조가 가능해지니다. 그리스 철학자인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데카르트 등 모두가 철학자 이면서 자연과학자였다.

자연을 탐색하는 일은 인간을 사색하는 일이다.

한글창제도 그렇고 시창작의 원리도 마찬가지로 인문과 자연이 소통을 넘어 통합으로 진행하는 일이다

통찰과 통섭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지식분야를 하나로 통일하자는 관점으로 다른 쪽에서 이쪽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원리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첫걸음이다.

조화로운 협업관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행복을 원하는가?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되는 창작원리다.

거창한 이야기보다는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풀어보고,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고민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는 세계를 더 가치있게, 아름답게, 의미있게 풀어내는 화법이다.

시창작도 마찬가지다.

 

참조 : 통찰(EBS 특별기획. 메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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