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는 왜 산책을 좋아할까?
철학자는 왜 산책을 좋아할까?
  • 남해안신문
  • 승인 2022.09.2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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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시대] 서석주 전 고용노동부 여수지청장
서석주 전 지청장.
서석주 전 지청장.

 

“걸을 때는 끝까지,항해할 때는 섬까지” 인도네시아 속담이다.인류 역사가 이동과 이주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면 걷기는 가장 오래된 이동 방식이다.

사람은 걸을 때 미지의 것을 취하고, 제 세상을 한 껏 넓히며 흐트러진 생각을 가다듬는다. 걷기와 산책은 두 발을 쓴다는 점에서 같지만 둘 사이엔 차이가 뚜렸하다.

관광, 쇼핑, 거리 시위는 걷기 범주에 든다. 산책은 훨씬 더 한가로운 걷기이고, 하나의 취향으로 다듬어진 걷기다.

걷기는 보상심리가 있지만 산책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무목적에 가까운 산책을 통해 얻는 것은 기분 전환, 무상의 기뿜을 낚는 게 전부다.

산책은 척추를 수직으로 세워 몸을 직립한 채로 발과 다리 근육을 쓰는 일이다. 무보상의 행위라는 데서 오는 승고함 속에서 산책의 즐거움은 오롯해진다.

루소는「에밀」에서 “우리의 첫 철학 스승은 우리 발이다”라고 썼다. 걷기가 정신의 약동을 자극하고, 우리를 창의적인 착상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인도한다는 믿음에서 그렇게 썼을 것이다. 걷기는 소요(消遙:느긋하고 자유롭게 거니는 행위)철학을 낳았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자주 걸었다.산책에 빠진 것은 소요학파뿐만 아니다.

몽테뉴, 칸트, 니체 같은 철학자도 다 산책가 들이었다. 칸트는 오후 다섯 시 정각이면 산책에 나선 걸로 유명하다. 그가 그 규칙을 어긴 것은 딱 두 번 뿐이다. 첫 번째는 1762년 루소가 에밀을 내놨을 때 그 책을 읽는 데 정신이 팔려 산책을 건너 뛰었다.

두 번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다. 그는 큰 충격으로 산책 나가는 걸 깜박했다.

어느 시인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천천히 산책을 즐기며 길가에 핀 아름다운 꽃들을 어루만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실로 화양연화(花樣年華:인생에서 꽃과 같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가 따로 없다.

 

산책하는 습관을 기르자

존 드라이드 시인은 “사람은 습관을 만들지만, 결국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웰링턴 장군도 “좋은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그리고 그것은 본래가지고 태어난 천성의 10배에 이르는 것을 가지고 있다” 고 했다.

지혜로운 이는 무소의 뿔처럼 늘 혼자서 걷는다.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걸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쾌척한 바람은 이마의 땀을 씻어주고, 새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일 때 벅찬 희망과 쾌감의 찰나적 섬광은 산책이 주는 진정한 보상이다.

…반대로 크는 나무는 자기 잎을 버리는 아픔으로 자기 땅을 기름지게 만든다. 우리 내 인생은 무엇을 버리는 아픔으로 우리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이처럼 산책의 발걸음은 곧 사유(思惟:생각하고 궁리함)의 궤적이다. 생각과 샘은 깊을 수록 맑다. 산책하면 홀연 지각이 열리고 세계와 나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니체는 산책을 정신의 영양 섭취, 휴양을 취하는 방식으로 삼았다. 더 활기차고 즐겁게 다시 태어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망서리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 가슴떨리고 영혼의 속살이 깊어지는 철학자로 힘차게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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