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각이요? 역사를 새기는 작업이죠”
“서각이요? 역사를 새기는 작업이죠”
  • 강성훈
  • 승인 2022.02.2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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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 곽금원 각자장
40여년 서각 외길 끝에 무형문화재 지정 영예
곽금원 각자장
곽금원 각자장

 

“서각이요? 단순히 나무에 글씨 새기는 것처럼 보여도 저는 역사를 새기는 작업이라 생각해요”

40여년 한 평생 ‘각자장’ 외길을 걸어 온 철우 곽금원 선생.

2021년은 곽금원 선생에게 여느 해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전남에서는 처음으로 ‘각자장’ 무형문화재에 각자장(刻字匠) 곽금원 씨(65)가 여수시의 네 번째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

각자장 곽금원 씨는 지난 4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후 지난해 말 전남도 무형문화재 제60호로 최종 고시됐다.

곽금원 선생은 각자장 보유자로 故 오옥진(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문하에서 사사를 받은 전승자다.

“40여년 평생 해 온 일이라 특별할 것 없지만,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해 오니 이런 기쁜 일도 생긴다. 전남 서각인들로서도 각자장이 생겨 좋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는 곽 선생이다.

특별할 것 없다는 문화재 지정 소감이지만, “40여년 각자장 인생을 인정받았다”는 데 내심 기쁨을 숨길 수는 없는 듯하다.

곽 선생이 무형문화재에 이르기까지 40년의 시간이 걸렸다.

첫 걸음은 남다른 손재주에 조각칼을 들고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것을 취미로 즐긴 데서 시작됐다.

그러다 1983년 우연히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고 오옥진 각자장을 만나면서 평생을 ‘서각’에 내맡겼다.

“선생님의 공방을 보는 순간 ‘아 내가 평생 할 일이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당장 가게로 뛰어 들어 배움을 청했지만,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유명 서예가로부터 추천서가 필요하다는 말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다 군입대를 했고, 제대 후 친구로부터 자신의 스승이자 당시 서예의 대가셨던 일중 김충현 서예가의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다. “세상 다 얻었다 싶었어요”

그렇게 공방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곽 선생은 그날로 1년 6개월여를 오옥진 선생의 문하에서 서각을 배웠다.

이후 여수에 내려왔지만, 틈나는대로 여수와 서울을 오가며 보다 깊이 있는 기술과 새로운 기법을 연마했다.

“당시 제자들 모임이 꾸려져 선생님의 강의를 함께 배우기도 했고, 궁궐 현판 보수 작업이 있을 때면 서로 날짜를 맞춰 함께 배우기도 했어요”

당시 결혼을 한터라 마냥 서울생활을 할 수 없어 여수에 내려왔지만, 생활고에 부딪혀야 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서각을 가르치면 되지 않겠나 싶어 교동 오거리에 있던 양복점 2층에 사무실을 얻어 사람을 가르치기도 했죠”

하지만, 대부분 한두달만에 그만두기 일쑤였다. 서각으로 생활이 될 리 없었다.

 

고민끝에 아예 공방을 차렸다.

“당시만 해도 지방에서 서각 자체를 모르다보니 돈을 내고 구입하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쉽지 않았다. 이후 생각해 낸 것이 기념품이었다.

개업집에 방문하는 이들이 기념품으로 판매하거나 난이 새겨진 서각작품을 선물용도로 판매하기도 했다. 그렇게 생활서각을 이어갔다.

힘든 생활이 10여년 이어졌고,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사찰이나 제작 현판 등의 주문이 줄을 이었다.

그렇게 40여년간 선생님 손을 거쳐간 작품은 수천점이 넘는다.

충청도, 서울, 강원도, 경상도 등 전국 각처의 사찰 현판 등 선생님의 흔적이 곳곳에 걸려 있다.

이제는 문화재로서 어엿한 대접을 받으면서 서각을 배우려는 이들도 줄을 잇고 있다.

“40여년전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2~3백명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최근 지방에서 치러지는 작은 공모전에도 출품작만 3백여점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서각을 배우고 있는 셈이죠”

아쉬움도 있다.

“대부분 현대서각이라는 작품을 옛날 방식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칼러풀하게 도색하는 등 새로운 방식의 작품이 많다. 조각하기는 쉽겠지만, 전통을 잃어버리지 않나하는 아쉬움이 크죠”

“서각을 하려면 우선 서예를 배워야 해요. 그래야 필체를 제대로 살리는 서각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거죠”

또, 재질에 맞는 목재를 구해 대패질 등 재료를 만드는 손길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각자장’의 필수 손길이다.

이렇게 많은 손길을 거쳐 빚어낸 작품 가운데는 6개월여 걸쳐 완성된 작품도 있다.

“40여년을 서각에 매달려 수천점의 작품을 제작했지만, 정작 제가 지닌 작품은 많지 않아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죠”라며 환하게 웃는 곽 선생이다.

그런 곽 선생에게도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긍심이 있다.

“서각은 역사를 새기는 작업이예요. 과거 선조들은 집안의 문집을 만들기 위해 모든 재산을 쏟기도 했어요. 책 한권 만드는데 현재 가치로 5억원 정도가 들었다고 하는데 기록을 남기기 위해 집안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팔아야 했던 거죠”

“하나의 현판이 새겨지면, 조각하는 사람, 글씨 쓰는 사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역사가 되는 거예요”

40여년 한길을 걸어 왔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다.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다.

“일상이요? 한결 같아요. 공부하면서 작품도 하고, 새로운 서체나 기법도 연구하고, 나무 관리하는 것도 일상이구요”

그런 일상에도 어려움은 있다.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예요. 지방에 있다보니 아직도 정보가 충분하지 못하고, 재료하나 구입하더라고 늦고, 새로운 기법을 접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바뀐 것이 있을까?

“역사를 새기는 일에 더 한 책임이 주어진 거죠. 가장 가치있는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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