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은 관계의 인문학이다.
시창작은 관계의 인문학이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21.08.2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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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67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 새롭게 정의 된다.

정체성도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간과 시간 등의 관계성에서 규명된다. 나란 개인의 정체성도 언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존재의미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시간이면서 공간이고 관계다.

시 창작은 관계의 인문학이다. 특히 통섭이다.

통섭적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과 소통하며 사는 사람으로 세계의 어떤 분야와도 소통하려는 사람이다. 통섭(統攝)은 줄기 통(統)과 잡을 섭(攝)으로 이루어진 말로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의미로, 인문 ·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방법론이다.

세계가 서로 통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전제로 세계를 새롭게 발견해 가는 방법론이자 존재의 의미를 확장하고 언어를 창조하는 창작론이 된다.

 

너 혹시 아니?

봄 앞에 서면

​우리 모두 꽃이란 것을

​너의 안쪽으로 날아간 바람의 말이

​너의 안쪽에 가 닿은 햇살의 말이

​꽃이란 것을

​내 안쪽에 날아온 바람의 말이

​내 안쪽에 닿은 햇살의 말이

​꽃이란 것을

너 혹시 아니?너 앞에 서면

나도 꽃이란 것을 신병은<개화>

 

꽃의 존재가 무엇일까? 꽃이 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꽃의 정의다. 바람의 말이고 햇살의 말이 꽃이고 우리가 모두 꽃이란 의미를 확장시킨다.

꽃이 피는 과정에서 보면 꽃이 피기까지 관계한 바람도 햇살도 어둠도 별빛도 모두 꽃이어야 한다.

그리고 너를 바라보는 나도 꽃이어야 한다.

통섭은 대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새로운 관점과 안목을 마련해주는 방법론이 된다.

예를 들면 ‘벌레 먹은 과일’을 ‘벌레가 먼저 맛을 봐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과일속에 든 햇살은 지나침이 없는지, 바람은 잘 스몄는지, 어둠은 또 넘치지 않았는지’를 나대신 먼저 기미를 해주었으니 안전하게 드시라는 뜻으로 볼수 있다는 것이다.

창작은 보는 법을 달리하는 것이다.

통섭에는 인간의 공감능력이 작용하게 된다. 나무와 풀, 꽃, 해와 달 등 어떤 존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공감능력을 바탕한다.

 

어느 노인이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았는데

개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 키스를 해주시면 저는 예쁜 공주로 변할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노인은 키스는커녕 개구리를 주머니 속에 넣어 버렸습니다.

개구리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키스를 하면 예쁜 공주와 살 수 있을 텐데요. 왜 그렇게 하지 않죠?”

그랬더니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줄까?

너도 내 나이가 되어 보면 공주보다 말하는 개구리가 더 좋을 거야“

 

모든 것이 관점의 문제입니다.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쁜 공주보다는 이야기 할 상대가 더욱 간절하기 때문에 말하는 개구리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한 사람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친구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주어진 삶을 멋지게 엮어가는 위대한 지혜는 우정이란 말이 떠오르는 우화입니다.

신은 인간이 혼자서는 행복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행복은 친구가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칭찬하고, 자신도 이웃과 친구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살아야 인생이 훨씬 아름다워집니다.

부모와 자식, 친구, 스승 등 관계 속에서 인간의 운명은 결정됩니다.

운명 또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한 선택일 뿐입니다.

매화꽃도 아침햇살 아래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비가 올 때 다르고 달밤에 다르다. ‘매화꽃이 피었다’는 말도 어떤 환경에서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설령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보았다고 하더라도 ‘나와 너’에 따라 다르다.

다 다르다.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 존재가치와 의미가 새롭게 규명 된다. 그래서 시창작은 주위 존재들과 제대로 잘 소통하려는 습관이 중요하다.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

 

한평생을 살을 맞대고 살다보면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 것 같은데도 참 다른 것이 많다는, 나이가 지긋이 들어 망각을 경쟁하듯 하다보니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서로를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이다. 알고보니 본질적으로는 서로 너무 먼 데서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필자도 나이가 지긋이 들다보니 공감이 가는 시다.

보는 관점을 달리하면 새로운 모습이 보이기 마련이다.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수태고지>는 가브리엘천사가 성모마리아에게 예수회임을 알리는 상황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 대해 300년 동안 원근법이 잘못되었다고 논란의 중심에 있었지만 레오나르도다빈치는 작품을 거는 위치를 고려하여, 즉 그림을 감상할 사람들의 시선의 각도를 고려하여 그렸다는 것이다.

참 놀라온 관점이 아닐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누가 그림을 정면에서만 보라고 했나?’라는 관점에서 이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 장치로 오른팔을 왼팔보다 길게 그렸고, 천사 가브리엘은 신의 공간을 상징하는 자연을 뒷배경으로 하였고, 성모마리아는 인간의 이성적 공간인 건물입구에서 독서대를 마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같은 대상이라도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파악되는 모습과 의미가 달라진다.

관계의 안목은 틈새에 있는 현상, 모습을 다르게 보기 위한 방법으로 낯설게 하기, 의도적으로 다르게 보기, 부정하기, 나만이 볼 수 있는 장치다.

 

존경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바람이 부는 것도 꽃이 피는 것도

어둠이 슬금슬금 산 그림자를 데리고 오는 것도

아침이 오는 것도

이슬 한 방울 톡 떨어지는 것도

사랑이 새처럼 지저귀고 꽃처럼 피어나는 것도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통속적인 세상을 다 뒤적여도 낯설고 경이롭다

너무 통속적이어서

너무 평범해서 정겨운 그 말이 문득 낯설다

그 말이 진심이다

경이롭다

사람이 사람 속으로 흘러들 수 있다는 말,

비로소 세상이 밝아진다

들춰보면 마음이 빛임을 안다

예순이 이순耳順임을 안다 -신병은<이순耳順>

 

예기禮記에 ‘毋不敬’이란 말이 있다. 세상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존재가치가 있고 존경의 대상이다.

풀꽃 한송이가 아무것도 아니면 나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얼마만큼 관계성을 제대로 들여다보는가가 통찰이고 소통이고 공감이다.

마음이 통해야 소통이 된다, 그러면 상대를 움직이는 공감이 된다, 공감이 소통이다.

시창작의 첫걸음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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