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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일상의 재발견이다.
시는 일상의 재발견이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19.11.15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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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51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깨닫기 위해서는 깨뜨려야 한다.

늘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만 안주해 버리면 새로운 발견은 있을 수 없다.

시 창작은 사전에 나와 있는 어휘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고유명사를 찾는 일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벽’의 사전적 의미는 ‘방이나 집 등의 둘레를 막은 수직 건조물’, ‘극복하기 어려운 곤경이나 장애, 한계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혹은 ‘사물의 관계나 교류를 가로막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벽의 시적 의미는 막힌 공간의 장벽이 아니라 열린 공간이 된다.

거기에 그림을 그리면 캔버스가 되고, 푸른 물감을 풀면 바다가 된다. 꽃을 걸면 꽃밭이 되고, 책을 놓으면 서가가 되는 열린 공간이다.

이처럼 상식을 뒤집어야 식상해지지 않는 그 자리에 새로운 의미 발견이 있다.

시적 인식은 생각의 틀을 벗어나 다른 의미로 옮아가는 생각이다.

남이 갖지 않은 사유의 힘,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창이 있어야 한다.

그 창이 바로 유추와 연상의 눈이다.

결국 시창작은 행복한 소통 세상인 커뮤니데아다.

그러면 누군가에게는 쓰레기가 누군가에게는 씨래기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오브제가 된다.

겨우살이를 보면서 ‘기대어 사는 삶’을 생각하고, 그러고 보면 세상에 어떤 존재도 기대어 살지 않은 것은 없다. 나무와 풀은 햇볕과 바람, 물과 땅에 기대어 살고 나는 또 아버지와 어머니, 스승에게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 한 마리 날아간 자리에 나무에 진동이 일어나는 현상을 이별에 대처하는 나무의 표현법이라 보는 것이다. <최기순의 떨림에 대하여>

바지락국을 끓여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입다운 바지락을 벌려보면 썩어서 악취가 난다는 것을, 제 속이 구린 조개는 이렇듯 꼭 다물줄 알지만 인간은 썩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을 알 수있다. <장상관 부패효과>

다르게 보기위해서는 일상에서 두어 걸음 떨어져 나와 주변풍경을 지켜봐야 한다.

오랜 관찰과 관조의 여유에서 새로운 삶의 통찰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이 답이다.

자연에서 상상력을 얻고 자연에서 깨달을 얻는다.

자연은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를 알려주는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왜 모르랴

그대에게 가는 길 왜 없겠는가

그대의 높이에로 깊이에로 이르는 길

오늘 아침 나팔 덩굴이 감나무를 타고 오르는 그 길

아무도 눈치 못할 속도로 꽃은 기어올라

기어이 울음인지 웃음인지

비밀한 소리들을

그러나 분명 꽃의 빛깔과 꽃의 고요로 쏟아놓았는데

너와 내가 이윽고 서로에게 이르고자 하는 곳이

꽃 핀 그 환한 자리 아니겠나 싶으면

왜 길이 없으랴

왜 모르랴

잘못 디딘 덩굴손이 휘청 허공에서 한번 흔들리는 순간

한눈팔고 있던 감나무 우듬지도

움칫 나팔덩굴을 받아낸다

길이 없다고 해도 길을 모른다 해도 자 봐라

그대가 있으니 됐다

길은 무슨 소용

꽃피고 꽃 피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

허공에 길을 내는

저기 저 나팔덩굴이나 오래 지켜볼 일이다 - 복효근 <마지막 날엔>전문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사는 일이 막막할 때 나팔꽃 덩굴이 어떻게 기어오르는지를 보면 쉽게 길이 보일 것이라는 시적발견이다. 나팔꽃에게서 한수를 배우게 된다.

‘꽃 피고 꽃 피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도 허공에 길을 낼 수 있다는 믿음이 곧 길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을 잘 들여다보면 기존의 편견을 허물고 그동안 보지 못한 삶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대상이 지닌 고정관념과 상투적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목을 키울 수가 있다.

잘 보면 자연은 단 한순간도 그대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

그 새로운 것을 인지하고 인식하는 것이 시 창작이다.

무심코 넘겼던 자연과 현상에서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고 그것에 나름의 삶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시창작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려는 안목이다.

‘껍데기’는 하찮은 부분으로 인식되어 그런 대상과 현상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두루 쓰인다.

그런데 그 보잘 것 없는 ‘껍데기’가 인식의 주요한 중심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떠나고 사라진 뒤에 그 존재를 추억하게 하는 것은 얇은 껍질인 것을 알게 된다.<복효근>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대상과 현상의 형상은 다 껍데기가 아니던가.

이런 생각이 시적인식이다.

즉 시적 인식은 일상에서 재미를 찾는 즐거움이다.

시는 늘 보이는 것 뒤편에 숨어있는 것을 일상의 틈 사이에서 재발견하는 ‘사소한 떨림’이다.

아직 이 세상에 기뻐할 일이 남아 있는가에 회의적이다가도 새로운 시의 싹을 하는 발견하는 순간에 삶이 환해지고 행복해 진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는 기뻐할 일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때마다 행복한 떨림을 만나게 된다.

가만히 살펴보면 주위에는 숱한 떨림이 있고 그걸 발견하는 순간에 나도 가슴 떨린다.

 

바람에 문풍지가 파르르 떨리듯

가만히 조용히 그리고 고요하게

나를 숱하게 떨게 했던 것들의 시간을 풀어내면

산다는 것이 사소한 떨림임을 알게 된다

뜨겁거나 미지근하거나 차거나

엉큼하거나 맑은 휴일처럼 상큼하거나

연두빛이거나 중년처럼 푸르거나

가을 은행잎처럼 노랗거나

떨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참으로 사소한 지문과 독백과 방백들이

알면서 알면서 다시 나에게 묻는 것이다

너 지금 어디를 떨고 있니?

너 지금 바깥이니 안쪽이니? - 신병은 <사소한 떨림>

 

그러고 보면 행복도 일상의 가치이면서 영혼을 행복하게 하는 영양소 세 가지가 자유, 유능, 관계라고 한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재미있고 의미 있고 몰입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유는 해야만 하는 것 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일이고, 관계성은 ‘이 안에 너 있다’라는 말처럼 너와의 관계를 헤아리는 마음이다. 관계성은 세상을 구축하는 중심축이다.

가끔 나는 누구와 있을 때 행복한가를 생각해본다.

행복해지려면 재밌고 즐거운 시간을 늘려라.

상투적이고 고정적인 삶이 카테고리에서 벗어나는 경험의 기회를 넓혀가는 일이다.

우리 삶은 결국 소유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경험을 위한 소비를 할 때 행복을 만난다고 한다.

새롭게 보는 능력의 시작이 경험이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之其味’

마음 안에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대학’에서도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때 새로운 것이 보인다고 했다.

일상을 잘 들여다보라.

마음으로 보라.

일상을 시청하지 말고 견문하라.

모두가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시청이라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은 견문이다.

그것이 바로 명상과 감성지수를 높여가는 시 줍는 일이다.

신병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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