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은 발칙한 상상력이 아니라 일상의 새로운 발견이다
시심은 발칙한 상상력이 아니라 일상의 새로운 발견이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19.06.1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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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46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글쓰기는 발상이 아니라 유추고 연상이다.

테크닉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해서 언어로 문장을 건축하는 사고 과정이다.

개념과 체험을 연결시켜 발휘하는 상상력의 산물이 바로 내가 쓴 글이다

유영만의 개념 사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너 커서 뭐해 먹을래

-김치

그런거 말고

-그럼 된장국, 감자

그러거 말고라니까

-그럼 멸치 ....

 

어린 초등학생과 대화의 내용이다.

여기서 ‘뭐해 먹을래’는 당연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래?라는 질문이다.

여기에서 읽기의 힘, 듣기의 힘을 생각하게 된다. 듣는 것도 답하는 것도 오류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 속에 가만가만 생각이 우물이 있다.

삶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가치요소가 먹는 일이고, 사는 일은 즐거운 유머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머는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시의 생명도 소통이기 때문이다.

시를 쓴다는 일은 사물의 속성에 대한 탐색이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비결이다.

단순히 아는 것의 차원이 아니라 깨달음의 차원이다.

그 방법적인 문제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다르게 보는 것, 이미 경험한 것들을 통해 다르게 생각하는 문제다.

예를 들면 ‘조삼모사朝三暮四’란 고사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조삼모사’란 중국송(宋)나라의 저공(狙公)이 자신이 키우는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내므로, 아침에는 네 개, 저녁에는 세 개를 주겠다고 바꾸어 말하니 기뻐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로 즉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하곤 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원숭이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똑똑하다는 또 다른 면모를 헤아릴 수 있다. 즉 세상살이가 앞일을 한 발자국도 내다볼 수 없는데 일단 먼저 네 개를 받아야겠다는 원숭이의 생각이 참 현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상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재발견을 위한 방법이 유추와 연상이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이형기 <낙화>

기다림만이 아름다운 시대는 갔다. 로소 싸움이 아름다울 때가 왔다 – 안도현<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늘나라 먼 길을 몸 가볍게 날기 위해 어머니는 몸을 비우시는 중이다 – 신병은<골다공증>

벌레먹은 나뭇잎이 아름다운 것은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 때문이다 – 이생진<벌레 먹은 나뭇잎>

나무를 베어내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 이상국 <어둠>

빈집 - 비어있는 집이 아니라, 집에 사람이 혼자일 때 빈집이 된다 – 정일근<빈집>

날 봤을까, 날 알아봤을까 – 유안진<옛날애인>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새로운 존재가치를 재발견해내는 재미가 매혹적인 일이다. 공광규 시인의 <담장을 허물다>도 담장을 허무는 것은 ‘텃밭아래 사는 백살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오고,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 들어왔다’고 했다.

나를 둘러친 울타리와 경계를 지우면 내가 더 넉넉해진다는 의미 발견이다.

어른이 된다는 의미도 단지 나이가 많다는 개념이 아니다. ‘하늘의 뜻을 헤아린다.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 어떤 일을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헤아린 공자의 마음이 어른의 마음이고 시의 마음이다. 즉 시는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從心의 마음임을 헤아리게 된다.

이처럼 시는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대상과 현상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시를 뜻하는 poem의 어원은 본래 희랍어 ‘만들다’라는 뜻, 만드는 사람, 크리에이터creator를 뜻한다. 한편으로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 예언가란 의미도 지닌다.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이생진<아내와 나 사이> 부분

 

‘아내와 나’의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에 대한 단상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로 만나 조금씩 알아가다 이제 겨우 조금 알 것 같은데 나이가 들고 망각을 밥먹듯하여 다시 서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갑니다. 그러고 보니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다’는 깨달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만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따르는 관점의 문제다.

‘인간’이 밑자리 하는 긍정적 아이콘이 중요하다.

안경 쓴 이유를 물으면 어떤 사람은 ‘안 보여서 썼다’하고, 또 어떤 사람은 ‘더 잘 보기 위해 썼다’고 한다. 물이 반이 차 있는 물통을 보면서 어떤사람은 ‘반 밖에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반이나 남았다’고 한다.

달팽이의 일화

굳이 ‘플라시보효과’ ‘노시보 효과’를 들먹이지 않아도 긍정의 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슴 따뜻한 희망의 언어,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도 언어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어둠속에 더 별빛이 선명하고, 희망은 절망이 피워낸 꽃이다.

다르게 생각하는 것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다르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종점에서 내리면 종점이지만 내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으면 출발점이 된다. 다르게 생각하면 '끝이 곧 시작'이 된다는 '끄트머리'의 의미생산이다,

눈이 있어야 한다. 눈빛이 있어야 한다. 눈이 있어야 볼 수 있다.

몸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다. 안목’은 세상을 재대로 보는 눈이면서 보이지 않는 과정을 어떻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러면 안목은 깊어야 할까? 넓어야 할까? 높아야 할까?

교사들에게는 아이들의 숨은 재능을 찾아내는 눈이 있어야 하고, 농사꾼은 날씨와 계절을 읽는 안목이 있어야 하고, 어부는 물길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예술을 보는 눈은 높아야 하고, 역사를 보는 눈은 깊어야 하고, 정치, 경제, 사회를 보는 눈은 넓어야 하고, 미래를 보는 눈은 멀어야 한다고 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높고, 깊고, 넓고, 멀리 보는 눈이 필요하다.

창작은 통섭의 눈이 없으면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아는 만큼 보는 것,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 때 비로소 본 것이 된다. 이것과 저것의 소통을 위해서 다양한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내속에는 너무도 많은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시창작도 결국은 내속의 어떤 나를 만날 것인가 하는 문제임을 알게 된다.

 

먼저 은밀하게 엉킨 매듭을 풀어야 해요

자잘한 풀꽃의 웃음소리 곁에 놓인 햇살도 몇 줌 섞어야죠

조였다 풀었다 산들산들한 허리도 몇 번 돌려야해요

팔을 돌려 껴안고 한동안 가만히 발효도 필요해요

그 때야 한 번도 갖지 못한 제 무게를 갖는 법이지요

혼자 깊어지는 결 따라

한때는 나무였을, 색이었을, 어둠이었을 깊이를 가늠하며

타이머를 맞춰야해요

몸을 부풀려 잘 견딘 상채기들이 노릇노릇 잘 익기 까지

기다려야해요

기다림은 때로 또 다른 부화를 위한 몸짓이어요

바람이 다시 부화해요

청동빛 새떼들이 팔랑대며 날아올라요 -신병은<바람굽는 법>

 

상식을 뒤집어야 식상해지지 않는 그 자리에 새로운 의미 발견이 있다.

깨닫기 위해서는 깨뜨려야 한다.

남이 갖지 않은 사유의 힘,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창이 있어야 한다.

그 창이 바로 유추와 연상의 눈이다.

결국 시창작은 행복한 소통 세상인 커뮤니데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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